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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왕 [忠定王]

"원나라에 의해 왕이 되었다가 쫓겨난 어린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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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요

충정왕(忠定王)은 고려의 제30대 왕으로, 고려가 몽골제국에 복속되어 있던 말기인 1349년부터 1351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즉위할 때 나이가 12세였으며, 2년 6개월 남짓 재위하였다가 왕위에서 밀려나서 강화도로 추방되었다가 이듬해 독살당하였다. 고려 정치에 대한 원나라 조정의 영향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이자 종국으로 치닫던 시기에, 원나라에 의해 임명되고 물러나게 되며,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던 기구한 운명의 어린 왕이었다.


2어린 임금이 연달아 왕으로 선택되다

충정왕의 이름은 왕저(王㫝)이고, 몽골식 이름은 미스젠도르지[迷思監朶兒只]이다. 1338년( 충숙왕(忠肅王) 후7)에 충혜왕(忠惠王)희비 윤씨(禧妃 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상세정보  그의 아버지 충혜왕이 폭정을 거듭한 끝에 원 조정에 의해 폐위되어 멀리 귀양을 가고, 뒤이어 충혜왕과 덕녕공주(德寧公主)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즉위하였으니, 그가 충정왕보다 한 살 위의 형이자 고려의 29대 왕인 충목왕(忠穆王)이다. 1344년 즉위하였으니,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8살이었으나, 재위 4년만인 1348년(충목왕 4) 12월 어린 나이로 죽었다. 고려의 중신들은 당시 이제현(李齊賢)을 곧바로 원 조정에 사신으로 보내, 다음 왕을 세워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후보는 둘 이었다. 하나는 충숙왕의 아들이자 충혜왕의 동복아우인 왕기(王祺), 즉 이후의 공민왕(恭愍王)이었고, 다른 하나는 충혜왕의 서자이자 충목왕의 동생인 왕저(王㫝), 즉 충정왕이었다. 상세정보  고려 신료들은 내심 젊고 야심찬 왕기를 지지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원 조정에서는 이듬해 2월, 당시 개경에 머물고 있던 왕저에게 입조(入朝)할 것을 명하였다. 다음 왕이 될 자질이 있는지 직접 시험해보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왕기의 즉위를 기대하던 고려의 신료들은 왕저가 원의 수도 대도(大都)로 가는 것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원과의 밀착을 통해 권력을 다져온 고려인들, 노책(盧頙), 최유(崔濡), 그리고 그의 외당숙 윤시우(尹時遇) 등이 그를 호위하여 끝내 원 조정에 들어갔다. 결국 원나라 황제는 왕저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전왕인 충목왕이 죽고 나서 6개월만의 일이었다. 상세정보  충정왕은 두 달 후인 7월 고려로 돌아와 정식으로 즉위하였다.


3혼란한 국내 정치, 시끄러워지는 국제 환경

충정왕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권은 그를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이들의 손에 쥐어졌다. 충정왕의 입조를 성사시켰던 주인공들로, 이는 다시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노책과 최유로 대표되는 이른바 부원파 세력들이다. 둘째는 손수경(孫守卿), 이군해(李君侅) 등 충혜왕대부터 국왕의 측근에서 활동했던 인물들로, 이들은 충혜왕비인 덕녕공주의 신임을 얻어 다시 득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는 충정왕의 외당숙인 윤시우와, 그의 모후인 희빈 윤씨의 외삼촌인 민사평(閔思平) 등 국왕의 외척들이었다. 이들이 재상직을 독차지하면서, 충목왕대에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했던, 그리고 충목왕의 다음 왕으로 왕기를 지지했던 신료들은 대부분 정치에서 소외되었다.
그런데 이 세 세력 사이의 공존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논공행상에 뒤이어 금세 터져나온 권력다툼은, 원나라 사신을 위해 국왕이 베푼 연회 자리에서, 국왕이 보는 앞에서 주먹다짐을 할 정도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상세정보  치열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우선 노책이나 최유와 같은 이들이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그 대신에 당시 제윤(諸尹)이라고 지목을 받았던, 왕의 모후인 희빈 윤씨를 중심으로 한 외척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다. 특히 윤시우는 윤왕(尹王)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권력을 농단하였다. 상세정보 
국내 정치가 기강을 잃고 흔들리고 있을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 역시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우선 중국 대륙에서의 변화이다. 1330년대 이후 거듭된 자연재해는 몽골제국에 심대한 위기를 불러오고 있었다. 특히 1344년에 홍수로 황하의 수로가 바뀌는 재앙이 발생하면서 강남의 곡창지대로부터 화북의 정치 중심지로 쌀 등을 공급하던 대운하의 통행이 막혀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를 바로잡기 위한 대공사에 무려 20만에 달하는 인부들이 동원되었고, 여기서 싹트기 시작한 반란은 135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게 되었다. 이른바 홍건군(紅巾軍)이 처음으로 깃발을 들었던 것이 1351년이었다. 이때부터 원나라는 대륙 전체에 걸친 반란과 중앙정부의 무능력한 대응으로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바다 쪽으로도 혼란의 시대가 닥쳐오고 있었다. 왜구(倭寇)의 침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1336년 일본이 남북조시대로 접어들면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규슈 일대에까지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리던 이 일대의 일본인들은 한반도와 중국 남부의 연안지역에 수시로 출몰하며 해적질을 일삼았다. 이러한 왜구의 활동은 이후 반 세기 가량 고려와 중국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사료에서는 이러한 사태가 정확하게 1350년에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상세정보  역사에서는 이들을 ‘경인년 이래의 왜구’라고 부른다. 왜구는 이후 반 세기에 가깝도록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르는 단위로, 한반도의 연해안은 물론 때로는 내륙 깊숙이까지 침입하여 고려 사회를 큰 혼돈에 빠뜨린 주범이었다.


4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쫓겨나다

안팎의 시련을 맞이해서 고려 정부는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였다. 우선 충정왕은 나이가 너무 어려 스스로 정치를 주도해가지 못하였다. 정권을 잡고 있던 외척을 비롯한 신료들도 난세를 헤쳐갈 만한 능력이나 정견, 혹은 그러한 의지를 보여주지 못하였다. 충정왕을 국왕으로 임명한 원 조정은 고려의 정치상황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결국 원 조정은 충정왕에 대한 지지를 거두어들이게 되었다. 그를 대신해서 새 왕으로 임명된 것은 앞서 두 차례 왕위계승 경쟁에서 밀려난 채 원의 대도에 머물고 있었던 강릉대군(江陵大君) 왕기로, 그가 바로 고려의 31대 임금, 공민왕이다. 상세정보  충정왕은 곧바로 강화(江華)로 쫓겨났다가, 이듬해 3월 짐독(鴆毒)을 먹고 죽었다. 상세정보  그의 무덤은 개성에 있는 총릉(聰陵)이다.
충정왕에 대해서 『고려사』의 찬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평을 남겼다. “충목왕과 충정왕은 모두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던 까닭에 덕녕공주와 희비가 모친임을 내세워 안에서 권세를 차지하였으며 간신과 외척들이 밖에서 권력을 휘둘렀으니, 두 임금이 비록 뛰어난 자질을 가졌다고 한들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충정왕대에는 강릉군(공민왕)이 왕의 숙부로서 나라사람들의 인심을 얻고 있었고 또한 상국이 그를 돕고 있었는데도, 제윤(諸尹)이 이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당을 지어 탐욕을 부리다가 화를 불러들여 끝내는 왕이 짐독을 맞게 하였으니 참으로 슬프다.” 상세정보 
고려사를 지은 사신들은 충정왕의 실패를 왕의 어린 나이와 외척의 발흥 탓으로 돌리고 있다. 사실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역사 속에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외척의 영향력을 받았던 임금은 충정왕만이 아니었음에도 이렇게 허무하게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은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돌이켜보면 충정왕은 왕위에 오른 것도, 거기서 물러난 것도 모두 원나라 조정의 뜻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 원나라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면서도, 동시에 고려에 대한 영향력만큼은 절정에 이르렀던 시대가 낳은 비극의 주인공이 충정왕이 아닐까 한다.




집필자 : 정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