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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神宗]

"노년에 잠시 왕위를 스쳐 지나간 허수아비 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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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요

신종(神宗)은 고려의 제20대 왕으로, 무신정권 시대인 1197년부터 1204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친형인 명종(明宗)최충헌(崔忠獻)의 손에 이끌려 왕좌에서 내려오고,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54세였고, 등창이 심해져서 아들인 희종(熙宗)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훙서했을 때에는 61세였다. 그의 삶을 요약하자면, 평생 왕족으로서 무난한 삶을 누리다가 노년에 잠시 이름뿐인 왕위를 스쳐 지나갔다고 평가할 수 있다.


2유유자적하던 왕족, 왕위에 밀려 올라가다.

신종의 이름은 왕탁(王晫)이고, 원래 이름은 왕민(王旼)이었으며 자는 지화(至華)였다. 상세정보  1144년(인종 22), 인종(仁宗)공예태후(恭睿太后)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평온한 시대였다면 그에게까지 왕위가 돌아올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1170년 무신정변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왕위에 있던 그의 큰형 의종(毅宗)이 쫓겨나고, 셋째 형 명종이 즉위하였던 것이다. 역시 무신의 손에 이끌려 왕위에 오른 명종은 30년 가까이 재위하면서도 무신들과 이렇다 할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의민(李義旼)을 몰아내고 새로 집권한 최충헌은 자신의 시대를 새로운 부대에 담고 싶어 했다. 특별한 이유 없이 명종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을 세울 것을 논의하였는데, 이에 신종이 선택을 받았다. 상세정보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54세였다.


3허수아비 왕

신종이 왕위에 오른 것은 전적으로 최충헌의 덕분이었다. 신종 스스로의 말로도 그것을 인정하였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왕위를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고자 최충헌에게 말하기를, “과인이 잠저에 있다가 왕위에 오른 것은 공의 힘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신종이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음은 자신이 마실 물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데서도 엿보인다. 이전까지 국왕들은 왕실의 전용 식수원인 다래정(炟艾井)이라는 곳의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러나 최충헌은 왕이 그 물을 마시면 환관들이 권력을 잡는다는 민간의 속설을 듣고, 그 우물을 허물어 버리게 했다고 한다. 상세정보 
관원을 임명하는 것은 국왕의 고유의 권한이다. 그러나 신종은 이마저도 제대로 행사해보지 못하였다. 당시 최충헌은 문신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부(吏部)와 무신의 인사를 담당하는 병부(兵部)를 겸무하면서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아예 자신의 집에 정방(政房)이라는 기구를 설치해두고 문무관의 인사 내용을 멋대로 결정한 뒤 국왕에게 알리면, 국왕은 다만 머리를 끄덕여 이를 승낙할 뿐이었다고 한다. 상세정보 
이런 형편은 사신(史臣)들의 눈에도 그대로 들어왔던 것 같다. 당시의 한 사관은 신종의 시대를 평하며, “옛날부터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한 것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아아 분통하도다.” 상세정보 라고 개탄하였다. 또 『고려사』에서는 그의 재위 기간을 총평하여, “신종은 최충헌이 세운 임금이었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 관직을 두고 없애는 것이 모두 그 손에서 나왔다. 왕은 다만 이름뿐인 자리를 차지하고서 신민들 위에 있었으니 허수아비와 같았다. 슬프도다.”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4안팎에서 들고일어나는 민초들

신종이 왕위에 있던 7년 동안은 중앙과 지방에서 민란이 연달아 터지던 시기였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1198년(신종 1)에 일어났던 이른바 만적의 난이다. 개경의 사노(私奴)였던 만적(萬積)이 개경의 노비들을 모아 각기 주인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키려다 실패로 돌아간 사건이다. 이때 만적이 개경 북산에서 노비들에게 했던 말이 뒤에 널리 회자되었다. “장군과 재상의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도 어찌 뼈 빠지게 일만 하면서 채찍 아래에서 고통만 당하겠는가!” 상세정보  그밖에도 개경에서는 나무를 하러 갔던 가노들이 교외에서 전투 연습을 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는 일도 있었다.
지방에서도 민초들의 봉기가 연이어 터져나왔다. 신종 2년에 경주(慶州)를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밀양(密陽), 진주(晋州), 김해(金海) 등 경상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들은 앞서 명주(溟州), 즉 지금의 강릉에서 일어난 반란세력과 연계하여 동해안 일대를 휩쓸기도 하였고, 점차 경주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신라를 재건하려는 시도로 이어질 기미를 보였다. 상세정보 
이렇게 민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무엇보다도 민초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불을 지핀 것은, 만적의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신하들이 국왕을 갈아치울 정도로 당시 팽배해있던 하극상의 풍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5잠시 왕위를 스쳐 지나간 그의 후손들

잠시 왕위에 머물다 물러난 신종의 운명은 그의 후손들에게도 이어졌다. 다만 그가 잠잠하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였던 데 비해, 그의 아들은 조금 달랐다. 신종의 뒤를 이어 1204년 왕위에 오른 희종은 24세의 청년이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7년째 왕위를 지키고 있던 그는, 한 차례 과감한 시도로 최충헌을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아슬아슬하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희종은 최충헌의 손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으며, 태자 왕지(王祉)를 비롯한 다른 왕자들도 모두 추방당하였다. 상세정보  이로써 신종의 자손은 고려의 왕통에서 멀어져버렸고, 이후의 왕통은 신종의 친형인 명종의 후손들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가 역사에서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뜻밖의 사태를 거치게 된 후였다. 1388년, 유명한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 일파는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이 신돈(辛旽)의 아들이라며 차례로 왕위에서 밀어내었다. 종친 가운데서 새로 왕위에 오를 인물을 고르던 그들의 눈에 띈 것이 바로 신종의 7대손이라고 하는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 왕요(王瑤)였으니, 그가 바로 공양왕(恭讓王)이다. 공양왕은 즉위한 지 만 3년이 채 못 되어 태조 이성계에게 양위함으로써 고려왕조의 마지막 왕이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왕위에 잠시 머물렀던 마지막 왕이 역시 왕위를 스쳐 지나간 신종의 후손이었음은 자못 우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집필자 : 정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