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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877(현석 6)년 ~ 943(태조 26)년
이칭 자:약천(若天),
시호:신성(神聖)
주요이력
주요이력
정기대감(精騎大監) 아찬(阿粲) 알찬(閼粲) 한찬해군대장군(韓粲海軍大將軍) 파진찬겸시중(波珍粲兼侍中) 개태사낙성화엄법회소문(開泰寺落成華嚴法會疏文) 흥법사진공대사비문(興法寺眞空大師碑文) 훈요(訓要) 계백료서(誡百寮書) 정계(政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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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락 왕융 몽부인 한씨 궁예 최응 환선길 이흔암 박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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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권1 태조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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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건 [太祖王建]

"후삼국 혼란기를 끝내고 새 시대를 열다"

이미지
1개요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이로, 고려의 제1대 왕이다. 877년에 태어나서 943년(태조 26)에 죽었다. 재위 기간은 918년~943년의 26년간이다.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이며, 자는 약천(若天)이다. 개성(開城)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금성태수 왕융(王隆)이며, 어머니는 몽부인 한씨(夢夫人 韓氏)이다. 918년에 고려를 건국하고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943년에 세상을 떠나니,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신성(神聖)이며, 능은 현릉(顯陵)이다.


2송악의 호족

왕건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외모는 이마가 뿔이 솟듯이 튀어 나왔으며 턱이 네모나고 이마가 넓었다. 도량이 크고 깊었으며, 목소리가 우렁차고 컸다. 상세정보 
그의 집안은 대대로 송악 지역의 호족이었다.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 위세를 떨치면서 901년에 철원을 도읍삼아 후고구려를 건국하자, 왕건의 아버지 왕융은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궁예는 왕융을 금성태수로 삼았다. 이때 왕융이 “대왕께서 만일 조선·숙신·변한 땅의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송악에 성을 쌓고, 먼저 나의 아들 왕건을 성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 하고 송악에 성을 쌓을 것을 추천하였다. 궁예는 발어참성을 쌓고 20세의 왕건을 성주로 삼았다. 곧이어 왕건은 광주(廣州)·충주(忠州)· 청주(淸州)당성(唐城)· 괴양(槐壤) 지역을 평정하고 아찬(阿湌)이 되었다. 903년 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의 나주(羅州)을 공격, 함락시켰다. 그리고 부근 10여 개 군현도 차지한 후 나주를 설치하였다. 이후 알찬(閼湌)으로 승진하였다. 궁예의 교만함과 포악함을 보고는 다시 변방으로 나갈 것을 요청해 해군대장군이 되었다. 광주, 진도, 압해(押海) 등지에서 견훤의 수군을 궤멸시켜 서남해안에서의 지배력을 안정시켰다. 이 공으로 913년에는 파진찬(波珍湌)에 올라 시중(侍中)이 되었다. 이때 다음의 일화처럼 왕건은 궁예의 의심을 받아서 죽을 고비를 만났으나, 최응(崔凝)의 기지로 목숨을 구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궁예가 태조를 급히 불러 성난 눈으로 뚫어지게 보며 말하기를, “경이 어젯밤에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반역을 모의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궁예가 일찍이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일컬었었는데, 이에 말하기를, “경은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남의 마음을 꿰뚫어보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내가 지금 선정(禪定)에 들어가서 관찰할 것이다.” 하고,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는 한참 동안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이때, 장주(掌奏) 최응(崔凝)이 곁에 있다가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뜰에 내려와 이를 줍고는 곧이어 빠른 걸음으로 태조의 곁을 지나면서 귓속말로, “자복하지 않으면 위태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태조가 곧 깨닫고 말하기를, “신이 진실로 반역을 꾀하였으니, 그 죄가 죽어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궁예가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은 정직하다고 하겠다.” 하면서, 곧 금과 은으로 장식한 말 안장을 태조에게 내려 주었다. 상세정보 


3고려의 건국과 통일

그 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고 정치가 더욱 흉폭해 지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이 왕건의 집으로 찾아와서 왕이 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918년 6월에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내쫓고 왕이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해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생 왕국의 안정을 위해서 이듬해 1월에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고, 개경이라 하였다. 이것은 자신의 근거지로 도읍을 옮겨서 왕위를 굳건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실제로 즉위 초부터 환선길(桓宣吉)· 이흔암(伊昕巖) 등 반란이 연이어 터지기도 하였던 것이다.
결국 새로 즉위한 태조 왕건에게는 왕권에 도전하는 반대세력을 누르면서 왕권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여기에 더해 대외적으로는 후삼국시대의 사회적 혼란을 종식시키고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과도 맞서 싸워야 하였다.
태조가 즉위 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국내정책은 민심안정책이었다. 신라 말기 이래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의 가혹한 조세를 경감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취민유도(取民有度 : 백성에게 조세를 수취할 때에 일정한 법도가 있어야 한다)의 표방은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다음과 같은 ‘ 예산(禮山)진조서’이다.
여름 5월에 예산진(禮山鎭)에 행차하여 영을 내리기를, “태봉주(泰封主)가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고 사직을 전복시켰으므로, 내가 그 위태로운 왕통을 이어받아 새 나라를 이룩하였으니 전쟁에 상처받은 백성을 노역(勞役)시킴이 어찌 나의 본뜻이리오. 다만 전쟁이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비바람을 무릅쓰고 주(州)·진(鎭)을 순찰하여 성(城)·책(柵)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남자는 모두 전쟁에 종사하게 되고, 부녀자들까지도 공역(工役)에 나가게 되니, 노고를 견디지 못하여 산림에 도망쳐 숨거나 관부(官府)에 호소하는 자가 얼마나 되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런데 권세 있는 집들이 또 따라서 능멸하고 포학하게 하니 내 한 몸으로 어떻게 능히 집집마다 가서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겠는가. 백성은 아뢰고 호소할 곳이 없으니 마땅히 나라의 녹을 받는 너희 공경장상(公卿將相)들은 내가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뜻을 잘 알아서 너희들 녹읍(祿邑)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러나 만약 관아(官衙) 안의 무지한 무리들이 녹읍에서 매우 지독하게 거둬들이기를 일삼는다면 너희들이 또 어떻게 능히 이를 알 수 있겠는가. 비록 혹 이를 안다 하더라도 또한 금지시키지 않고, 호소하는 백성이 있어도 관리들은 번갈아 저희들끼리 서로 숨기고 도와 주니, 원망과 비방하는 소리가 일어남은 주로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내가 일찍이 일일이 이를 타일러 이런 줄을 아는 자에게는 더욱 힘쓰게 하고,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경계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 영을 어긴 자는 이미 따로 염권(染卷)을 행했는데, 염권을 행한 후에도 오히려 다른 사람의 허물을 숨기는 것을 좋은 일로 여겨, 이를 들어 논하는 자가 없으니 선하고 악한 사실을 어떻게 들어 알 수 있으며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절개를 지키고 허물을 고칠 자가 있겠는가. 너희들은 내가 훈계하는 말을 준수하고 나의 상벌을 따라서 죄가 있는 자는 귀천을 논할 것 없이 벌이 자손에게까지 미치게 하고, 공이 많고 죄가 적으면 상벌을 참작하여 행하며, 만약 허물을 고치지 않으면 그 녹봉을 추탈하여 종신토록 벼슬의 반열에 끼이지 못하게 할 것이다. 만약 뜻이 나라를 위하는 데 간절하여 평생토록 잘못이 없으면 살아서는 영화와 녹을 누릴 것이요, 죽은 후에는 명가(名家)라 일컫게 되어 자손까지 우대하여 포상을 내릴 것이다. 이것은 다만 과인이 살아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전하여 규범으로 삼을 것이다. 백성에게 고소를 당하여 소환하였는데 오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재차 소환하여 먼저 곤장 10대를 쳐서 영(令)을 따르지 않은 죄를 다스리고 나서, 그제야 범한 죄를 논할 것이다. 만약 관리가 이 영을 준수하지 않고 고의로 지체하면 날짜를 계산하여 책벌할 것이며, 또 위세와 권력을 믿어 영으로 손을 댈 수 없는 자는 그 이름을 아뢰라.” 하였다. 상세정보 
하지만 태조는 유교적인 인식만으로 사회의 혼란을 종식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민심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도참설, 음양설 등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 보한집(補閑集)』에 있는 태조와 최응의 대화를 보면 알 수 있다.
태조는 전쟁을 하면서 나라를 세운 때에 음양설(陰陽說)과 불교에 뜻을 두었다. 참모 최응(崔凝)이 “전(傳)에 ‘세상이 어지러우면 문(文)을 닦아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은 비록 전쟁을 하더라도 반드시 문덕(文德)을 닦아야 합니다. (저는) 불교와 음양설에 의지해서 천하를 얻은 이를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태조가 “이 말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우리나라는 산수가 신령스럽고 기이하며 땅은 궁벽하여 풍토가 부처와 신을 좋아하여 복을 빌고자 한다. 바야흐로 지금 전쟁이 끝나지 않아 안위가 일정하지 않아 (백성들이) 밤낮으로 두려워하며 어찌 할 바를 모른다. 부처와 신의 도움과 산수의 영험함을 생각하는 것이 고식(姑息)에 효과가 있을 뿐이다. 어찌 이것을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얻는 대원칙으로 삼겠는가. 난리가 끝나고 안정되면 풍속을 바꾸어 아름답게 교화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최응은 태조가 불교와 음양설에 기대어 민심을 얻으려는 것을 비판하면서 문(文)과 덕(德)을 닦을 것을 권하고 있다. 최응의 지적에 대해서 태조는 백성들이 불교와 음양설을 믿기에 그를 이용하는 것일 뿐, 혼란이 진정되면 문덕에 따른 교화를 할 것이라고 답하였다. 여기서 언급된 난리는 후삼국의 분열로 인한 전쟁이다. 따라서 태조는 전쟁이라 혼란 상황에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데에 불교 등 종교의 역할이 효과적임을 알고 있었다. 태조는 문(文)과 덕(德)이라는 유교적 가치를 알고 있음에도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과 안정된 상황에 따라 민심을 효과적으로 안정, 결집시킬 수 있는 수단을 유교에 따른 정책 수단으로만 한정짓지 않고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세력에 대해서는 유력한 호족들의 딸과 정략적으로 혼인했으며, 지방의 호족 및 그 자제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특히 유력한 호족과의 혼인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29명의 부인을 두었을 정도이다. 그 만큼 호족과의 연계에 신경을 쓰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실제로 29명에 달하는 대부분의 부인이 당시의 대호족 출신이었다. 이들 호족들에게는 사심관제의 활용을 통해 지역에서의 기득권을 인정해 주는 한편으로 기인(其人)으로 호족의 자제를 개경으로 보내도록 하여 인질을 잡아두었다. 이를 통해서 호족들과의 관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고려의 영역을 대상으로 주현제를 실시하여 군현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호족에게 대광, 대상, 원윤 등의 관계(官階)를 수여하여 고려의 지배질서 안에 이들을 묶어두면서 위계화하는 효과도 거두었다.
대외적으로 태조는 신라·후백제와의 병립, 즉 후삼국시기라는 현실을 마주하여 해결해야했다. 우선 태조는 신라에 대해서는 유화적인 정책을 썼다. 920년(태조 3)에 10월에 견훤이 신라의 합천, 초계 지역을 침범하자, 신라에 구원병을 보냈다.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신라와의 친선 관계를 형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후백제와는 초기에 화전(和戰) 양측에서 관계가 이루어졌다. 왕건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신을 견훤이 보내오기도 했지만, 왕건의 즉위를 계기로 충청도 지역의 여러 지역이 후백제측으로 넘어가고, 920년의 전투에서 고려가 신라의 편을 드는 등의 요인으로 인해서 양국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924년에 고려와 후백제는 안동(安東)에서 전투하고 인질 교환을 통해 잠시 소강 국면을 만들었지만, 927년(태조 10)에 왕건이 용주(龍州)를 공격하면서 다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같은 해에 견훤이 신라의 경주까지 쳐들어가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세우는 과정에서 고려와 후백제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견훤의 경주 침략 소식을 들은 태조는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하였는데, 공산(公山)에서 견훤군과 마주쳐서 싸웠다가 대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태조를 구하기 위해 신숭겸과 김락(金樂)의 두 장군이 대신 전사하였다. 고려는 군사적 열세를 실감하게 되었다. 이후 태조는 전열을 재정비하여 930년에 안동(安東) 전투에서 김선평, 권행, 장길 등 안동지역 호족의 도움으로 견훤에 대승하였다. 이를 계기로 태조는 후삼국의 경쟁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후 935년에 아들 사이의 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되어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던 견훤이 도망쳐서 고려로 왔다. 또 같은 해 10월에 신라 경순왕이 자진해서 고려에 항복하였다. 이들 군주들을 태조는 극진히 대접을 하고 지위도 높게 대우하였다. 이로써 태조가 후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확실해졌다. 마침내 태조는 936년에 후백제와 일선군(一善郡)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최후결전을 벌였고, 패배한 신검을 추격하여 황산(黃山)에서 다시 한 번 무찔러 항복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태조 왕건은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4새로운 시대의 통치규범

태조는 통일 직후 『정계(政誡)』 1권과 『계백료서(誡百寮書)』 8편을 저술하여 반포하였다. 이 저술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지켜야 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으로 생각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이어 태조 23년인 940년에는 통일에 공이 있는 이들을 포상하기 위해 역분전(役分田)을 실시하였으며, 다시 941년에는 공신당을 세워 삼한공신(三韓功臣)을 기렸다. 이로써 후삼국 통일에 대한 헌창과 기념을 통해 국가적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죽기 얼마 전에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직접 전달하여 후계자들이 귀감으로 삼도록 부탁하였다. 「훈요십조」는 그의 정치사상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구체적인 조항은 다음과 같다.
1조는, 우리나라의 대업(大業)은 반드시 여러 부처님의 호위를 힘입었다. 그러므로 선종(禪宗)·교종(敎宗)의 사원을 창건하고 주지(住持)를 임명하여 분수(焚修)하여 각각 그 업(業)을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훗날 간특한 신하가 정권을 잡으면서 중의 청탁을 들어주어 사원(寺院)을 다투어 서로 바꾸고 빼앗으니 꼭 이를 금지할 것이다.
2조는, 모든 사원은 모두 도선(道詵)이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의 형세를 추점(推占)하여 개창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추점하여 정한 외에 함부로 더 창건하면 지덕(地德)을 손상시켜 왕업이 장구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으니, 짐이 생각건대, 후세의 국왕·공후(公侯)·후비(后妃)·조신(朝臣)들이 각기 원당(願堂)이라 일컬으면서 행여 더 창건할까 크게 근심스럽다. 신라의 말기에 사탑(寺塔)을 앞다투어 짓다가 지덕을 손상시켜 망하기까지 하였으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3조는, 적자(嫡子)·적손(嫡孫)에게 나라를 전하고 집안을 전하는 것이 비록 상례(常禮)라 하지마는, 요의 아들 단주(丹朱)가 불초하므로 요는 순에게 선위(禪位)했으니 실로 공심(公心)인 것이다. 무릇 원자(元子)가 불초하거든 그 차자(次子)에게 전하여 주고, 차자가 모두 불초하거든 그 형제 중에서 뭇 신하들이 추대하는 자에게 전하여 주어 대통(大統)을 계승하게 하라.
4조는, 우리 동방은 옛날부터 당(唐) 나라의 풍속을 본받아 문물과 예악이 모두 그 제도를 준수하여 왔으나, 나라가 다르면 사람의 성품도 다르니 반드시 구차히 같게 하려 하지 말라. 거란(契丹)은 짐승이나 다름없는 나라이므로 풍속이 같지 않고 언어 역시 다르니 부디 의관(衣冠) 제도를 본받지 말라.
5조는, 짐은 삼한 산천의 드러나지 않은 도움을 힘입어 대업을 성취하였다.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地脈)의 근본이 되니, 마땅히 사계절의 중월(仲月)에는 행차하여 백 날이 넘도록 머물러 나라의 안녕(安寧)을 이루도록 하라.
6조는, 연등(燃燈)은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고, 팔관(八關)은 천령(天靈)·오악(五嶽)과 명산(名山)·대천(大川)과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훗날 간특한 신하가 더하거나 줄이자고 건의하는 자가 있으면 꼭 그것을 금지해야 한다. 나 역시 처음부터 마음에 맹세하기를 법회일(法會日)은 국기일(國忌日)을 침범하지 않으며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기로 하였으니 공경스러이 이에 따라 행해야 한다.
7조는, 왕이 신하와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마음을 얻으려면, 간(諫)하는 말을 따르고 참소를 멀리하는 데 요점이 있을 뿐이니, 간하는 말을 따르면 성스럽게 되며, 꿀처럼 달디단 참소도 믿지 않으면 참소가 저절로 그치는 것이다. 또 백성을 시기에 맞추어 부리고 부역을 가볍게 하며, 납세를 적게 해 주고, 농사의 어려움을 알아 주면, 저절로 민심을 얻어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이 편안해질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고소한 미끼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고기가 낚시에 걸리고, 상을 중하게 주는 곳에는 반드시 훌륭한 장수가 있으며, 활을 당기는 앞에는 반드시 새가 피하고, 인덕(仁德)을 베푸는 곳에는 반드시 선량한 백성이 있다.'고 하였으니, 상벌이 정당하면 음양이 순조로울 것이다.
8조는, 차현(車峴 차령산맥(車嶺山脈))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밖은 산형(山形)과 지세가 모두 배역(背逆)하니 인심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의 주·군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국척(國戚)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국가를 변란하게 하거나 백제가 통합당한 원망을 품고 임금의 거둥하는 길을 범하여 난리를 일으킬 것이며, 또 일찍이 관청의 노비와 진(津)·역(驛)의 잡척(雜尺)에 속했던 무리들이 권세 있는 사람에게 의탁하여 신역을 면하거나 왕후(王侯)나 궁원(宮院)에 붙어 말을 간사하고 교묘하게 하여 권세를 부리고 정치를 어지럽혀서 재변(災變)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그 선량한 백성일지라도 벼슬 자리에 두어 권세를 부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
9조는, 모든 제후(諸侯)와 뭇 관료들의 녹은 나라의 크기에 따라 이미 제도가 정해져 있으니 늘이거나 줄여서는 안 된다. 또 고전(古典)에, '공적(功績)에 따라 녹을 제정하고, 관작(官爵)은 사정(私情)으로 주지 않는다.' 하였으니, 만약 공이 없는 사람이거나 친척·사사로이 친한 사람들이 헛되이 국록을 받게 되면 백성이 원망하고 비방할 뿐만 아니라 그 본인들 역시 복록(福祿)을 길이 누리지 못할 것이니 꼭 이를 경계해야 한다. 또 강하고 악한 나라(거란(契丹)을 가리킴)가 이웃하고 있으니 편안한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병졸에게는 보호하고 구휼하며 부역을 참작하여 면제해 주어야 하며, 해마다 가을에는 용맹하고 날랜 인재를 사열(査閱)하여 그 중에서 뛰어난 자는 알맞게 계급을 올려 주어야 한다.
10조는, 나라나 가정을 가진 이는 근심이 없을 때에 경계를 하여야 하니, 널리 경사(經史)를 보아 옛 일을 거울삼아서 오늘날의 일을 경계하라. 대성인이신 주공(周公)도 무일(無逸) 한 편을 성왕(成王)에게 올려 경계하도록 하였으니, 마땅히 그림을 그려 벽에 걸어 두고 출입할 적에 보고 반성하여야 한다.” 상세정보 
태조는 첫째 아들인 혜종(惠宗)의 외가가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것을 우려하여 원활한 왕위계승을 위해 측근인 박술희(朴述熙)에게 왕무를 보살펴 주도록 당부하였다. 마침내 태조는 943년 5월 29일(병오)에 세상을 떠났다.




집필자 : 김보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