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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1109(예종 4)년 ~ 1146(인종 24)년
이칭 자:인표(仁表),
시호:효공(孝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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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평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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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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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15 세가15 인종 5년 3월 28일(무오)

인종(고려) [仁宗]

"어질고 너그러운 국왕, 두 번의 반란을 맞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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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즉위와 외척의 득세

1109(예종 4)~1146(인종 24). 고려 제17대 왕. 1122~1146년까지 24년간 재위했다. 초명은 구(構)이고 해(楷)로 고쳤다. 자는 인표(仁表)이다. 예종(고려)(睿宗)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순덕왕후(順德王后)이며, 1115년(예종 10) 2월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예종 사후 이자겸(李資謙) 등의 추대를 받아 1122년 4월에 15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너그럽고 자비로웠다. 또 학문을 좋아하고 스승과 벗에 대한 예가 밝았다. 능은 개성에 있는 장릉(長陵)이며, 시호는 효공(孝恭)이다.
비(妃)로는 즉위 후에 이자겸(李資謙)의 3녀와 4녀를 받아들였으나, 이자겸의 난으로 두 비는 모두 폐비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이후 다시 혼인을 하였으니, 중서령(中書令) 임원애(任元敱)의 딸 공예태후(恭睿太后), 병부상서 김선(金璿)의 딸 선평왕후(宣平王后)이다.
인종이 예종의 뒤를 이은 상황은 왕 자신이 15세로 어리기도 하였지만, 그보다 외척의 권력이 높았던 때였다. 즉 예종의 측근으로 발탁되어 성장한 이자겸은 자신의 둘째 딸을 왕비로 들일 수 있었고, 그 아들인 인종이 왕위를 계승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이자겸은 인종에게 셋째, 넷째 딸을 다시 인종에게 왕비로 들임으로써, 예종대에 이어 다시 왕의 장인되었다. 인종에게 이자겸은 외조이면서 장인이었던 것이다. 이를 배경으로 하여 이자겸은 큰 권력을 쥐게 되었다.
이자겸은 사사로이 자신의 부 주부인 소세청을 송에 보내 표문을 올리고 토산물을 바치면서, 자신을 ‘지군국사(知軍國事)’라고 자칭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이 칭호를 자신에게 내려줄 것을 왕에게 강하게 요구하면서, 끝내는 인종도 이자겸을 미워할 정도였다. 이에 1126년(인종 4) 2월에 일부 신하들이 이자겸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이자겸측의 반격으로 도리어 궁궐이 불에 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인종은 왕위를 이자겸에게 넘겨주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으며, ‘이씨가 왕이 된다’는 ‘십팔자(十八字)’의 참언을 믿은 이자겸은 두 번이나 인종을 독살하려고 기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이자겸의 난(李資謙-亂)이라고 한다. 이 난리는 이자겸의 중요한 협력자였던 척준경(拓俊京)을 설득하여 이자겸을 사로잡도록 하게 만들면서 끝나게 되었다. 이에 이자겸은 영광(靈光)으로 유배가서 1126년 12월에 사망하였고, 이자겸을 몰아내는 데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던 척준경도 이듬해에 정지상의 탄핵을 받아 섬으로 유배가서 죽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으로 인해 인종대 초반의 상황은 정치적 기강이 해이해지고,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궁궐도 거의 불에 타는 등의 피해가 발생했다. 무엇보다 지배귀족층 내부의 분열과 갈등이 표면화되었던 데에 의미가 있다.


2위기와 극복

이자겸과 척준경의 일파가 제거된 후 개경의 귀족세력 중에서 김부의(金富儀)· 김부식(金富軾) 형제와 이수, 이지저 부자, 그리고 새로 외척이 된 임원애(任元敱) 계열이 크게 부상하였다. 한편 개경에 근거하던 이들과는 달리 서경 출신으로, 권신이던 척준경을 탄핵하여 그의 실각을 이끌어낸 정지상 역시 중요한 인물로 새롭게 떠올랐다. 정지상은 동향의 승려 묘청(妙淸)과 일관(日官) 백수한(白壽翰) 등을 천거하여 왕의 신임을 받을 기회를 마련해주었고, 근신인 김안(金安), 문공인(文公仁) 등과도 정치적으로 협력 관계를 만들고 있었다. 이처럼 당시 크게 두 계열의 정치세력이 존재하는 가운데, 이중 정지상, 묘청 등이 중심이 되어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였다.
인종은 1127년 3월에 묘청과 백수한의 건의에 따라 서경에 행차하여 관료조직의 감축, 불필요한 세금의 감면, 농사의 장려, 민생 안정, 질병 구제, 빈민 구제 등 15조에 이르는 유신 개혁안을 선포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① 方澤에서 토지의 신에게 제사지내어 四郊의 기운을 맞을 것.
② 사신을 지방에 보내어 자사·현령의 잘잘못을 조사하여 그를 포상하거나 좌 천하게 할 것.
③ 수레나 복장의 제도를 검약하게 하도록 힘쓸 것.
④ 쓸데없는 관원과 급하지 않은 사무를 제거할 것.
⑤ 농사일을 힘쓰게 하여 백성의 식량을 풍족하게 할 것.
⑥ 侍從官이 모두 한 사람씩 천거하도록 하고, 천거된 사람이 올바른 인물이 아니면 그를 벌할 것.
⑦ 국고의 식량 저축에 힘써서 백성을 구제할 일에 대비할 것.
⑧ 백성에게서 거두어 들이는 것에 제도를 세워 일정한 조세와 공물 이외는 함부로 걷지 못하게 할 것.
⑨ 군사를 보살피어 일정한 시기에 훈련을 실시하는 것 이외에는 복무하지 않도록 할 것.
⑩ 백성을 보살피어 지방에 정착하여 살게 하며 도망하여 흩어지지 않도록 할 것.
⑪ 濟危鋪와 大悲院에는 저축을 풍족히 하여 질병에 걸린 자를 구제할 것,
⑫ 국고의 묵은 식량을 억지로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서 무리하게 그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하며, 또 묵고 썩은 곡식을 백성에게 찧으라고 강요하지 말 것.
⑬ 선비를 선발하는데 詩·賦·論을 쓰게 할 것.
⑭ 모든 고을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확충할 것.
⑮ 산림이나 못에서 생산되는 이득을 백성들과 함께 나누어 가지며 침해하지 말 것. 상세정보 
결국 서경 출신의 일군의 신진 세력이 형성되는 가운데 기존 귀족관료들과의 갈등이 점점 고조되어 갔다. 하지만 인종은 1128년(인종 6)부터 묘청의 난이 일어나던 1135년(인종 13) 직전까지는 자신이 직접 정치개혁을 주도하면서 정국을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이 시기 인종의 국정 목표는 앞서 보았던 인종이 1127년에 서경에 행차하였다가 개혁의 정책을 직접 밝힌 명령, 곧 ‘유신지교’에서 대표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또 교육제도에 대한 정비도 이루어져서, 1123년에 식목도감(式目都監)으로 하여금 학식(學式)을 만들게 하여, 국자학(國子學)은 3품 이상, 태학(太學)은 5품 이상, 사문학(四門學)은 7품 이상의 자손들이 입학하도록 그 자격기준을 정하였다. 또 1133년에는 예종 때 7재의 하나로 설치되었던 무학재(武學齋)를 폐지함으로써 무예로 선비를 뽑는 일은 없어졌다.
1128년에는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정지상(鄭知常) 등이 주장한 서경길지설(西京吉地說)에 인종이 공감해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에 대화궐(大華闕)을 짓고 수시로 서경을 순행하였다. 1131년 서경의 대화궁에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해 여러 부처와 명산의 신(神)을 제사하게 하였는데, 이에 서경천도론이 크게 일어났다.
1135년 묘청·정지상·백수한 등이 서경천도론·금국정벌론·칭제건원론 등을 내세웠으나, 김부식(金富軾) 등에 의해 좌절되면서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김부식을 서경정토원수(西京征討元帥)로 삼아 난을 평정하게 하였다.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정국은 김부식 등 유교정치이념에 충실한 문신관료들이 주도하는 상황으로 흘러갔다. 그리하여 각종 국가예제, 과거제 등의 정비를 통해 고려의 기존 제도에 따른 질서를 회복하여 지배체제를 안정시킬 것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경제, 사회적인 변화상을 해결하려는 보다 적극적인 정책이 모색되지 않은 상황이라 하겠다.
유교적 경향이 강해지면서 인종은 1140년 이전에 김부식 등에게 명해 관찬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하게 하여 1145년에 완성하였다. 이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모방한 기전체(紀傳體)로 50권이나 되는 방대한 것이었다.




집필자 : 김보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