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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고려) [睿宗]

"아버지의 뜻을 이어 여진을 정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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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요

1079년(문종 33)∼1122년(예종 17). 고려 제16대 왕. 재위기간은 1105∼1122년의 17년이다. 이름은 우(俁)이다. 자는 세민(世民). 숙종(고려)(肅宗)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명의태후(明懿太后)이다. 1079년(문종 33) 정월 정축일에 태어났다. 1094년(선종 11)에 검교사공·주국에 임명되었고 이후 태위까지 올랐다가 아버지인 계림공이 즉위하면서 1100년(숙종 5)에 왕태자가 되었다. 선종(고려)(宣宗)의 딸인 경화왕후(敬和王后), 이자겸(李資謙)의 둘째 딸인 문경태후(文敬太后)를 비롯해 4명의 부인이 있었으며, 뒤를 이은 인종(고려)(仁宗)을 비롯해 1남 2녀를 낳았다. 1122년 4월에 재위 17년만에 죽었으며, 능은 개성에 있는 유릉(裕陵)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2여진정벌

예종은 일찍부터 뜻이 깊고 침착해 도량이 넓었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도 부왕이던 숙종의 기조를 계승하고자 하였다. 한데 즉위 후 국정의 방향에 대해 주요 신하들에게 건의문을 올리도록 한 결과, 화폐사용의 금지를 비롯해 조종의 유훈을 따를 것을 요청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즉 숙종대의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이에 예종은 일부 수용하기도 하면서도 화폐 유통과 여진 정벌(女眞征伐)만큼은 포기하지 않다.
그럼에도 예종이 여진 정벌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에는 어려웠다. 이에 별무반의 창설과 양성을 주도해 온 윤관(尹瓘)의 지위를 높이면서 여진 정벌을 계속 추진하도록 하였다. 1107년 8월 임인일에 변방의 장수가 아뢰기를, “여진이 멋대로 날뛰어 변성에 침돌(侵突)하고, 그 추장이 조롱박 하나를 꿩고리깃에 매달고 여러 부락에 돌려가며 보이면서 일을 의논하는데 그 마음을 추측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듣고 중광전 불감(佛龕)에 간직하여 두었던 숙종의 맹세한 글을 꺼내어 양부 대신에게 보이니, 대신 등이 받들어 읽고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성고(聖考)의 유지(遺旨)가 깊고 간절함이 이와 같은데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에 글을 올려 선고의 뜻을 이어 적을 치기를 청하였다. 왕은 망설이며 결정을 짓지 못하고 최홍사에게 명하여 태묘에서 점치게 하였더니, 감(坎)이 기제(旣濟)로 변하는 괘를 얻자 드디어 출병하기로 의논을 결정하고, 윤관을 원수(元帥)로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았다. 상세정보 
여진 정벌을 무리없이 추진하기 위해 예종은 정벌에 염원을 담은 숙종의 맹세문을 보관하고 있다가 여진 문제가 심각하다는 변방의 보고가 있자, 이를 대신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여진 정벌을 결정하도록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리고 다시 태묘에서 점을 의식까지 치루면서 확고하게 여진 정벌의 방침을 정하였다. 결국 이해 12월에 윤관을 원수로 하여 17만명의 대군을 편성하고는 정주(定州)를 떠나 여진족을 소탕하고 갈라전(曷懶甸) 일대를 점령하고자 했다. 윤관은 우선 새로 점령한 지역에 웅주(雄州), 영주(英州), 복주(福州), 길주(吉州)의 4성을 쌓고 1108년 2월에는 앞의 4성과 공험진(公嶮鎭)을 방어진으로 편제하고 함주(咸州)를 대도호부로 삼았으며, 3월에는 의주와 통태진, 평융진에도 성을 쌓았다. 이들 점령 지역을 이전처럼 고려에 귀순한 여진족이 거주하는 기미주로 둔 것이 아니라, 대도호부-방어진이라는 양계 지역에 대한 고려의 행정체계를 이곳에 적용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 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고착시키겠다는 적극적인 영토 확장의 의사가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고려는 남쪽 지역에서 꽤 많은 수의 백성들을 이주시키고도 있다. 이때 윤관의 2차 여진 정벌에 대한 묘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12월에 왕이 위봉루(威鳳樓)를 방문하여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에게 부월을 하사하여 보냈다. 을유일에 윤관·오연총이 동계에 이르러 장춘역(長春驛)에 병사를 주둔하였다. 군사의 수가 대강 17만인데 20만이라 하였다. 병마판관 최홍정(崔弘正)·황군상(黃君裳)을 정주와 장주 2주에 나눠 보내고, 여진 추장을 유인하여 말하기를, “국가에서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돌려보내려고 하니 너희들은 와서 명을 들으라" 하였다. 추장이 이를 믿고 고라(古羅) 등 400여 명이 이르니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복병을 출동시켜 이를 섬멸하였다. ……(中略)…… 을미일에 윤관은 5만 3000명을 이끌고 정주 대화문(大和門)으로 나가고, 중군병마 김한충(金漢忠)은 3만 6700명을 이끌고 안륙수로 나가고, 좌군병마사 문관은 3만 3900명을 이끌고 정주 홍화문(弘化門)으로 나가고, 우군병마사 김덕진은 4만 3800명을 이끌고 선덕진 안해(安海)로 나가 양수(兩戍) 사이에서 막고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竦), 원흥도부서사(元興都部署使) 정숭용(鄭崇用), 진명도부서부사(鎭溟都部署副使) 견응도(甄應陶) 등은 선병(船兵) 2600명을 이끌고 도린포(道麟浦)로 나갔다. 윤관이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 : 함경남도 함주)을 지나서 한나절을 가니 여진은 군사의 위엄이 매우 장대함을 보고 모두 도망쳐 달아나 가축들만 들에 널렸다. 문내니촌(文乃泥村)에 이르니 적이 들어와 동음성(冬音城)을 확보하였다. 윤관은 병마령할(兵馬鈴轄) 임언과 홍정을 보내어, 정병을 거느리고 급히 공격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中略)…… (병신일에) 중군은 고사한(高史漢) 등 35촌을 격파하여, 380급을 베고 230명을 사로잡았고, 우군은 광탄(廣灘) 등 32촌을 격파하여 290급을 베고 300명을 사로잡았으며, 좌군은 심곤(深昆) 등 31촌을 격파하여 950급을 베었다. 윤관은 대내파지에서부터 37촌을 격파하여 2120급을 베고 500명을 사로잡았다. 녹사 유영약(兪瑩若)을 보내어 승리를 알리니 왕이 기뻐하여 유영약에게 7품의 직을 주고, 좌부승지병부낭중(左副承旨兵部郞中) 심후(沈侯)와 내시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한교여(韓皦如)에게 명하여 조서를 내려 윤관·오연총 및 여러 장수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윤관은 또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어 땅의 경계를 확정하고, 또 일관(日官) 최자호(崔資顥)를 보내어 터를 보아 몽라골령 아래에 성(城) 950칸을 쌓아 영주(英州)라 부르고, 화곶산(火串山) 아래에 992칸을 쌓아 웅주(雄州)라 하고,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74칸을 쌓아 복주(福州)라 하고, 궁한이촌(弓漢伊村)에 670칸을 쌓아 길주(吉州)라 불렀다. 또 호국인왕(護國仁王)·진동보제(鎭東普濟)의 두 절을 영주성 안에 창건하였다. 상세정보 
이때 고려가 새로이 확보한 지역이 어디인지에 대한 윤관전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여러 장수를 보내 경계를 확정하였는데, 동으로는 화곶령에, 북으로는 궁한이령, 서로는 몽라골령에 이른다. 상세정보 
그 땅이 사방 300리로, 동으로는 큰 바다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개마산을 끼었으며, 남으로는 (고려의) 장주 및 정주와 접한다. 산천의 수려함과 토지의 기름짐이 백성을 살게 할 만한데 본래 고구려가 소유한 곳으로, 그 옛 비석의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상세정보 
이렇게 새로 점령한 지역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정작 현대의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크게 1) 오늘날의 함경도 일대에 걸쳐 있다는 설, 2) 길주 혹은 마운령(摩雲嶺) 이남으로 함경남도 일대로 보는 설, 3) 넓은 의미의 함흥평야(咸興平野)로 보는 설로 나뉜다. 특히 1)의 경우 두만강 북쪽으로 경계가 넘어가지만 그 경계의 비정에는 연구자마다 의견이 갈리고 있다. 결국 이 정벌에서 고려가 정복한 지역이 정확한 위치, 소위 ‘9성’으로 불리는 지역의 구체적인 위치나 이주한 백성의 규모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완전히 해명되지는 않고 있다. 게다가 애초 성을 쌓았던 ‘9성’과 나중에 여진에 돌려주는 지역의 지명이 일치하지 않고 있는 점도 혼란을 주는 요소이며, 새로 점령한 지역에 과연 9개의 성만을 쌓았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다.
이렇게 윤관의 두 번째 여진 정벌은 성공적으로 보이면서, 1108년 4월에 개경으로 개선했다. 하지만 살던 근거지를 잃은 여진족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해서 저항을 하면 전황은 점점 불리해졌다. 이에 윤관과 오연총이 다시 출정하였지만 여전히 고전했다. 여기에 여진은 9성의 반환을 요청해왔다. 또 9성 지역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고 골짜기가 깊어 지키기 어려운데다가 기근과 질병도 발생하면서 전쟁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에 고려는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여진의 간절한 애원과 조정의 논의 끝에 1109년 7월에 9성 지역을 여진에 돌려주게 되었다. 여진 정벌은 사실상의 실패였던 셈이다. 그리고 예종의 뜻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면 정벌을 직접 추진한 윤관은 이후 패전의 책임을 묻는 탄핵에 시달리는 등 여진 정벌은 고려의 정치에 큰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


3문화적 업적

예종은 교육, 학문 등의 분위기 진작에도 힘을 쏟았다. 문종대에 최충(崔冲)의 문헌공도로 시작된 사학들이 번성하면서 정작 국립대학이라 할 국자감은 쇠락해 갔다. 이에 예종은 1109년 국학(國學)에 사학을 본따 학과별 전문 강좌인 칠재(七齋)를 설치해 관학(官學)의 진흥을 꾀하였다. 1116년에는 청연각(淸讌閣)과 보문각(寶文閣)을 짓고 학사(學士)를 두어 경서(經書)를 토론하게 함으로써 유학을 크게 일으켰다. 1119년에는 국학에 양현고(養賢庫)라는 장학 재단을 설립하였다. 이 때 유사(有司)에게 명해 학사(學舍)를 널리 설치하고, 국학 칠재의 정원을 유학 60명과 무학 17명으로 하며, 명유(名儒)를 뽑아 학관(學官)으로 삼아 가르치게 하였더니 글을 숭상하는 풍습이 크게 일어났다.
예종대는 대외 환경의 측면에서 여진의 빠른 성장으로 급격한 변동이 일어난 때이기도 한다. 고려는 중국의 송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송으로 유학생을 파견하기도 하고 송으로부터는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오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들어온 대성악이 바로 아악(雅樂)이라는 궁중음악이다.
여진과의 관계는 예종대 초반에 여진 정벌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잠시 소강상태로 있었다. 그러다가 1115년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골타(阿骨打)가 여진족을 통일해 자신을 황제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거란(요)가 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 원병을 청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1117년는 금나라에서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라는 글로써 화친(和親)하기를 청했으나, 조정의 반대로 회답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예종이 즉위할 당시 고려의 사회적 상황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예종이 교서를 내리면서 “지방의 관리들 가운데 청렴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자는 열에 한 두 명도 없고, 뇌물을 좋아하고 개인적 이익을 도모하여 백성을 해치니, 백성의 유망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열 집 중 아홉 집이 비었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과장이 섞인 표현이었겠지만 백성들의 상황은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예종은 세금의 감면 조치를 비롯하여 지방관이 없는 지역에 감무라는 새로운 관직을 만들어 파견하기 시작했다. 1112년에는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해 빈민들의 시약(施藥 : 무료로 약을 지어주는 일)을 담당하게 했다. 이처럼 지방사회가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종의 문치를 강조하는 정책의 추진은 기본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들이었다. 즉 교육제도의 개편을 통해 신진관료들이 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하였으며, 문한관, 대간직의 비중 확대, 청연각, 보문각의 설치 등을 통해 국왕의 측근을 양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120년 11월에는 팔관회(八關會) 열고 태조 왕건(太祖 王建)의 공신인 신숭겸(申崇謙)· 김락(金樂)을 추도해 이두문으로 된 향가(鄕歌) 형식의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예종이 손수 지었다. 이것은 후백제와의 전투 중에 태조를 구하기 위해 전사한 신숭겸, 김낙을 추모함으로써, 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임금님을 온전케 하온 /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쳤네 / 넋은 가셨으되 / 몸 세우고 하신 말씀 / 직분을 다해 활 잡는 이 마음 새로워지기를 / 좋다, 두 공신이여 / 오래오래 곧은 / 자취를 나타내실지어. 상세정보 




집필자 : 김보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