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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 1371(공민왕 20)년
이칭 자:요공(耀空),
봉호:진평후(眞平侯),
봉호: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
이칭:청한거사(淸閑居士)
주요이력
주요이력
영도첨의사사사판중방감찰사사제조승록사사겸판서운관사(領都僉議使司事判重房監察司事提調僧錄司事兼判書雲觀事) 왕사(王師) 전민추정도감판사(田民推整都監判事)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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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박상충 김구용 이존오 이숭인 정도전 우왕 창왕 최영 명덕태후 김용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 덕흥군 안도치 이인복 조희고 홍사범 반야 왕중귀 목인길 이수산 임군보 임박 이공수 김원명 이승경 오인택 이강달 최맹손 김보 이춘부 김란 박희 이구수 양백익 박춘 석문성 송경 원송수 한공의 홍영통 안우경 김정 김흥조 김제안 이인 기현 진윤검 고인기(석온) 박의중 경복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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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회군 순자법(순자격) 국자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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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 도당 전민변정도감 성균관(고려) 숭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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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辛旽]

"공민왕을 대신한 개혁가! 노비들에겐 성인, 권력자들에겐 요승"

이미지
1출신 및 개요

신돈은 영산(靈山)(靈山) 사람으로 이름은 편조이며 자는 요공이다. 공민왕이 청한거사라는 법호를 내린 바 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어머니는 옥천사(玉泉寺)의 비였다. 아버지가 다른 동생 강성을이 있었다. 신돈은 공민왕에 의해 발탁되어 왕권에 버금갈 정도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공민왕대 중엽 이후 급성장한 무장세력 및 세족들을 숙청하고 정치·사회적 개혁을 단행했다. 결국 공민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지만 그의 집권기 동안 이루어졌던 개혁들은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이후에 조선 건국 과정을 주도한 신흥유신들의 정치세력화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2신돈 집권의 배경과 활동

신돈의 집권은 1365년 5월, 공민왕이 그를 사부로 삼고 국정에 대해 자문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앞서 1358년에 신돈은 김원명(金元命)의 소개로 공민왕을 만나 그의 신임을 얻은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승경(李承慶)은 신돈을 ‘나라를 어지럽힐’ 인물이라 비난하고 정세운(鄭世雲)은 그를 요승이라 하여 죽이려는 등 그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고, 이에 왕은 그를 피신시켰다. 상세정보  이후 그를 반대하던 자들이 죽은 후 신돈은 다시 공민왕을 찾아와 궁 안에 거처하며 왕의 신임을 받았다.
신돈에 대한 국정자문은 단순한 자문의 단계를 넘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제도적으로 신하들이 왕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통로는 차단되고 실질적인 권력은 신돈 개인에게 집중되었다. 이러한 당시의 권력구조는 “내외의 권력이 모두 신돈에게 모였다”라고 표현되고 있다. 몽골에서 신돈을 ‘권왕(權王)’이라 칭했던 것이나, 명덕태후(明德太后)가 공민왕을 책망하면서 왜 그에게 ‘국병(國柄)’을 맡기고 있는지 묻고 있는 데에서도 당시 신돈이 국왕에 준하는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세정보  이는 신돈이 왕과 복식을 똑같이 했다는 것이나, 그가 왕을 대신해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있었던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상세정보 
그런데 이러한 신돈의 ‘집권’은 신돈의 정치적 욕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공민왕의 강력한 명령과 의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후 1367년에 오인택(吳仁澤) 등에 의해 신돈을 제거하려는 모의가 있었을 때, 신돈은 공민왕에게 자신이 공민왕의 명령에 따라 정치의 표면에 나서게 되었으며 ‘간악한 자’들을 모두 없애고 백성이 편안해지면 다시 ‘산림’으로 돌아가려 했다고 하면서 살려줄 것을 애원했다. 상세정보 
한편 1368년 국자감시(國子監試)의 시험 감독관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신돈과 환자 이강달(李剛達)이 서로 다른 인물을 추천하여 다투자, 공민왕은 국자감시 자체를 없애버린 일도 있었다. 상세정보  이러한 사례들은 신돈의 비상한 권력의 원천이 공민왕에게 있었음을 보여준다.
1365년 5월에 공민왕은 신돈을 사부로 삼고, 신돈의 ‘참소’를 받아들여 최영(崔瑩)을 계림윤으로 강직시키고 찬성사 이인복(李仁復), 밀직 조희고(趙希古), 홍사범(洪師範), 최맹손(崔孟孫) 등을 파면하였다. 그리고 신돈의 측근인 김보(金普), 이춘부(李春富)를 도첨의찬성사로, 임군보(任君輔), 김란(金蘭), 박희(朴曦)를 밀직부사로 삼아 그들을 대신하게 했다. 이어서 신돈은 찬성사 이구수(李龜壽), 평리 양백익(梁伯益), 판밀직 박춘(朴椿), 예성군 석문성(石文成) 등을 참소해 귀양보냈다. 6월에는 이공수(李公遂), 경복흥(慶復興), 이수산(李壽山), 송경(宋卿), 원송수(元松壽), 왕중귀(王重貴), 한공의(韓公義) 등을 면직하고 김보, 이인복, 이인임(李仁任), 권적, 목인길(睦仁吉), 박원경, 홍영통(洪永通) 등을 요직에 임명했다. 7월에는 최영, 이구수, 석문성, 박춘 등에 대한 국문을 단행하여 자복을 받아냈다.
신돈은 국정에 참여하여 권세를 잡은 지 30일 내외에 신흥 무장세력 및 세신대족과 왕의 측근 등 당대의 유력한 문신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이는 공민왕이 신돈을 통해 당시 자신이 국정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는 그가 즉위 초부터 구상했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1361년 2차 홍건적(紅巾賊) 침입이 끝날 무렵 일어난 정세운 살해사건 및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등 삼원수 살해사건, 그에 이어진 흥왕사(興王寺)(興王寺) 난, 덕흥군(德興君)의 공격 등은 공민왕의 세력기반을 약화시키고 무장세력이 새로운 정치적 지배세력으로 부상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362년, 홍건적을 격퇴하는 데에 공을 세운 정세운이 전쟁에서의 공으로 공민왕에게 총애받을 것을 우려한 김용(金鏞)(金鏞)은 왕명이라 속여 정세운 휘하 장수들인 이방실, 안우, 김득배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다시 이들에게 지휘관을 살해한 반역의 죄를 씌워 살해했다. 상세정보  곧이어 1363년 3월에는 국왕의 대표적 측근 중 한 명이었던 김용에 의해 흥왕사 난이 발생했다. 이때에는 공민왕을 시해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공민왕은 시해를 면했으나 왕으로 위장하고 있던 환자 안도치(安都赤)(安都赤)가 죽음을 당했다. 상세정보  한편 1362년 말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덕흥군 사건은 몽골 황제가 공민왕을 폐위시키려는 시도로 양자 사이에 실제적 군사 충돌까지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고려군이 승리했으나, 이는 공민왕으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세정보 
위 사건들을 통해 김용, 정세운, 안우, 김득배 등 공민왕의 측근으로 그 주요한 세력기반이 되었던 자들이 모두 제거되었다. 반면, 위 사건들을 수습하는 데에 공을 세운 최영 등의 무장세력이 대거 공신으로 책봉되면서 새로운 권력집단으로 등장했다. 무장세력의 대두로 군공 중심, 무관 위주의 인사행정이 이루어지면서 관료체계의 불균형이 초래되었고, 무장세력이 도당(都堂)(都堂)의 주축을 구성하게 되면서 공민왕의 국정운영에 장애가 되었다.
1364년 12월, 공민왕은 풍저창사 정득년에게 명해 환관에게 쌀을 하사하도록 했으나 정득년은 왕명이 도당을 경유하지 않은 것이라 하여 왕명을 받들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그를 장류하려 했으나 당시 찬성사였던 최영의 만류로 공민왕은 결국 정득년을 석방했다. 상세정보  왕명에 대해 풍저창사가 도당의 동의여부를 들어 거절한 것도 그렇지만 최영이 나서 그를 옹호하여 결국 왕이 한발 물러서는 모습은 당시 국왕과 도당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한편 공민왕은 신돈을 집권시키는 과정에서 신료층에 대해 강한 불신을 표명한 바 있다. 당시의 정치세력들에 대해 “세신대족들은 친당이 뿌리처럼 이어 뻗어 서로 허물을 가려 숨겨주고, 초야의 신진들은 실제 감정을 숨기고 일부러 겉을 꾸며 명망을 취하니 그들이 귀현해지면 스스로 문벌이 한미함을 부끄럽게 여겨 대족들과 인척을 맺어 처음의 의지를 다 버리고, 유생은 유약하여 강직한 이가 적으며 또 문생·좌주·동년의 칭호가 있어 당을 만들고 사정을 따르게 되니 이 세 부류 사람은 모두 쓸 수 없는 것이다.”라 평한 것이 그것이다. 상세정보 
공민왕은 세신대족과 초야신진, 유생이 서로 연결되어 당파를 만드는 것이 개혁을 막고 있다는 인식하에 이들과 관계가 없는, 세상으로부터 독립한 사람인 신돈을 등용해 당대의 폐단을 개혁하고자 했다. 이에 신돈이 집권한 후, 공민왕은 그를 통해 왕권으로 제압하기 힘들 정도로 성장해 있던 정치세력들을 숙청하고 여타 정치세력들에 대해서도 그들을 국왕을 중심으로 결집시키기 위한 대대적 개편작업을 단행했다.
대규모의 숙청이 단행된 후인 1365년 7월, 신돈은 진평후(眞平侯)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사 판중방감찰사사 취산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판서운관사(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領都僉議使司事判重房監察司事鷲山府院君提調僧錄司事兼判書雲觀事)에 봉해졌다. 상세정보  매우 이례적으로 복잡하고 고양된 관직명으로, 역시 특별했던 신돈의 권력을 잘 보여주는 관직명이다. 1366년 5월에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고 신돈이 그 판사가 되어 권세가들이 탈점한 토지와 노비를 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전민변정사업은 이전 시기에도 실시되었지만, 이때는 대대적인 세신대족 숙청 이후 행해진 것이기에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세정보 
정치제도적 측면에서도 1368년에 관리의 근무일수에 따라 그 승진을 결정하는 순자법(순자격)(循資法)이 단행되었다. 이는 당시 무장세력들이 군공으로 급속히 승진하여 발생했던 관료체계상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국정 정상화를 이루기 위한 조치로서 의미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성균관(고려)(成均館) 중영 및 과거제 개편 등의 교육, 문화적 측면에서의 조치들이 주목된다. 1367년에 공민왕은 성균좨주 임박(林樸)의 건의에 따라, 숭문관(崇文館)의 옛터에 성균관을 중영하도록 했다. 또한 1368년에는, 친시(親試)를 단행하여 유신들의 좌주-문생 관계를 국왕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했다.


3신돈에 대한 비판과 실각

신돈 등용을 통해 국정주도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공민왕의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 공민왕은 신돈에게 거의 전권을 위임하다시피 했으며, 신돈에게 왕과 대등한 예를 행하는 것을 허용하는 파행적 정치운영을 함으로써 많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신돈이 집권할 당시 이제현은 그의 골상이 옛 흉인의 그것과 같다고 하며 왕에게 그를 멀리 할 것을 청했다고 한다. 상세정보  1366년에는 간관 정추와 이존오(李存吾)가 군신관계의 문란을 이유로 신돈을 격렬히 비판했다. 이는 군신의 예를 바로잡고자 하는 정당한 비판이었지만 공민왕은 이에 대해 극렬한 반응을 보이며 이들을 투옥, 좌천시켰다. 상세정보  또한 1367년 10월에는 오인택, 경천흥, 목인길, 안우경(安遇慶), 조희고 등 신돈에 의해 숙청당했던 자들에 의해 신돈을 제거하려는 모의가 이루어졌으나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장류당했다. 1368년 10월에도 김정(金精), 김흥조(金興祖), 김제안(金齊顔) 등에 의해 신돈 제거 모의가 이루어졌으나 역시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처벌당했다.
이러한 비판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신돈의 권력이 유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공민왕과의 관계가 주효했다. 그런데 신료들의 비판에도 굳건했던 공민왕의 신돈에 대한 지지는 1369년경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1369년에 신돈은 사심관(事審官)제도를 부활시켜 스스로 5도 도사심관이 되고자 함으로써 자신의 세력기반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공민왕은 그의 청을 거절했다. 같은 해 7월에 신돈은 충주로의 천도를 건의했지만, 이 역시 실행되지 못했다. 충주 천도를 무산시킨 후, 공민왕이 “국사는 대신이 불가불 참여하여 들어야 할 것”이라고 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상세정보  그리고 다음해인 1370년 10월에 공민왕은 친정을 선포했고, 12월에는 6년 만에 처음으로 친히 정치를 주재했다. 이어 이듬해인 1371년 7월에는 역모의 죄를 씌워 신돈을 제거했다.
1371년 7월, 신돈의 문객이었던 이인(李韌)에 의한 신돈 반역 관련 익명서를 기화로 공민왕은 신돈의 도당인 기현(奇顯), 최사원, 진윤검(陳允儉), 고인기(석온)(高仁器(釋溫)) 등을 잡아 심문한 뒤 죽였다. 이어 신돈을 수원으로 귀양보낸 후 죽였다. 신돈의 반역 모의의 구체적 내용은, 자신의 권세가 강해짐에 따라 왕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염려하여 먼저 왕을 시해하고자 했으나 한차례 실패했으며, 이에 다시 시해를 위한 모의를 했다는 것이다. 상세정보  그러나 신돈의 반역 모의가 실재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예컨대 신돈의 도당들이 처형되고 있는 상황에서 신돈 자신은 며칠 동안 그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점, 공민왕이 그를 죽이면서 그의 죄를 묻는 글에 처음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식을 낳은 것과 도성 안에 7채의 집을 지은 것 등을 들고 있을 뿐, 반역과 관련한 내용은 없는 점 등은 신돈 반역 모의의 실재성을 의심스럽게 한다. 상세정보 
이에 신돈의 실각은 그를 통해 이루어졌던 공민왕의 개혁에 대한 세족들의 반발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더하여 이는 신돈을 통해 정치세력을 재편하고, 이를 통해 국정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했던 공민왕의 시도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둠으로써 공민왕이 파행적인 정치운영을 청산하고자 한 결과로 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공민왕과 신돈의 관계 균열이 공민왕의 국왕권이 신료층을 제어해가는 과정이 어느 정도 완료된 시점과 맞물려 있으며, 공민왕이 명에 대한 사대를 결정함으로써 그간 그의 국왕권에 장애가 되었던 몽골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게 된 시기와도 맞물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4신돈 집권과 공민왕대 이후 정국 동향

신돈의 집권은 공민왕 당대에 그가 국정주도권을 다시 장악하고 개혁을 추진하는 데에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이후 정국 동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성균관은 중영 이후 성균관을 중심으로 신흥유신들이 집결하여 이들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이때 이색(李穡)이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정도전(鄭道傳) 등이 교관으로 활동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우왕 원년에 북원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명에 사대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 주목된다. 나아가 이들이 이후 정국현안 및 국가의 장기적 방향성에 대한 관점 차이로 분기, 대립하면서 조선 건국의 과정을 주도하게 된다는 점에서 공민왕대 성균관 중영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편, 신돈의 존재는 공민왕의 왕위를 계승한 우왕(禑王) 및 그의 아들 창왕(昌王)의 출신문제와 관련해 이후 정국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공민왕은 신돈의 비첩인 반야(般若)로부터 모니노, 즉 우왕을 얻었다. 그런데 1388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 단행되는 과정에서 이성계 세력에 의해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는 우창비왕설이 제기되었다. 이 주장의 진위 여부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이는 결국 조선 건국세력에 의해 조선 건국의 주요 명분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상세정보 




집필자 : 이명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