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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1054(문종 8)년 ~ 1105(숙종 10)년
이칭 자:천상(天常),
봉호:계림공(鷄林公),
시호:명효(明孝)

숙종(고려) [肅宗]

"친조카를 제거하고 왕에 오른 국왕, 부국강병을 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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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문종의 주전정책과 대외관계 변화

1054(문종 8)∼1105(숙종 10). 고려 제15대 왕. 재위 1095∼1105.
초명은 희(熙)이고 즉위 후에 옹(顒)으로 고쳤다. 자는 천상(天常). 문종(고려)(文宗)의 3남이고 어머니는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이다. 12대왕 순종(順宗)·13대왕 선종(고려)(宣宗)과는 동복형제이다. 비(妃)는 유홍(柳洪)의 딸 명의태후(明懿太后)이다.
숙종은 1058년 7월 기축일에 났다. 이후 1065년(문종 19) 2월에 계림공(鷄林公)에 봉해졌다. 1092년(선종 9)에는 선종을 호종하여 서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자라서는 효도하고 공경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웅걸스럽고 굳세어 과단성이 있고, 오경·제자서(諸子書)와 사서를 해박하게 열람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상세정보 
1105년에 서경에 행차하였다가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능(陵)은 개성시 장단군 진서면 판문리 구정동에 있는 영릉(英陵)이며, 시호는 명효(明孝)이다. 이후 인종(고려)(仁宗) 18년에 문혜(文惠), 고종(고려)(高宗) 40년에 강정(康正)으로 시호를 각각 더 붙였다.
1083년에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장자인 순종이 왕위를 이었으나 불과 석 달만에 역시 세상을 떠나면서 둘째아들인 국원공이 뒤이어 13대 국왕인 선종(재위 1083.10.~1094.5.)으로 즉위하였다. 선종의 치세 후반기로 가면서 고려사회의 지배층인 문벌귀족 내부의 갈등이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때에 선종의 뒤를 이어 11세의 아들인 헌종(고려)(獻宗)이 즉위하였다. 당시 선종에게는 헌종 외에 또다른 부인인 원신궁주(元信宮主)와의 사이에 한산후 윤(漢山侯 昀)이라는 아들이 더 있었다. 원신궁주의 오라버니인 이자의(李資義)가 자신의 조카를 헌종의 후사로 삼으려고 계획하였다. 이에 1095년(헌종 1) 7월에 이자의가 사병을 모아 거사하려고 하자, 선종의 동생인 계림공 희가 평장사 소태보(邵台輔), 상장군 왕국모(王國髦) 등과 연결하여 국왕을 호위하는 한편으로 이자의를 살해하였다. 이때의 공으로 계림공은 중서령이 되었다가 이해 11월에 헌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니, 이가 숙종이다. 이 사건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종실과 외척의 갈등이 대립을 한 것이었지만, 외척세력의 권력장악을 꺼리는 많은 관료들이 숙종의 행동에 동조하거나 묵인하였다. 그래서 흔히 이 사건을 이자의의 난(李資義-亂)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계림공측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아마도 당시 왕실과 외척의 대립이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듯하여 문종이 숙종을 사랑하여 항상 말하기를, “뒷날에 왕실을 부흥시킬 자는 바로 너다.”라고 말하였다. 어찌 보면 왕실의 기대를 받던 이였던 셈인데, 실제로 “1095년에 선종을 호종하여 서경(西京)에 갈 때, 그가 머물던 막차(幕次) 위에 자기(紫氣)가 날아오르니, 기운을 살피던 사람이 왕자(王者)의 상서라 하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상세정보 
이렇게 왕이 된 숙종은 일단 원신궁주 이씨와 한산후를 인주(仁州)으로 내쫓고, 자신의 즉위에 공이 큰 소태보를 수상으로, 왕국모를 재상으로 발탁하는 인사조치를 취하였다. 왕이 된 숙종은 왕권의 강화와 안정적인 왕위 계승을 마련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왕실이 외척에 휘둘리게 된 데에는 어린 임금의 등장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 점은 어린 아들을 세운 선종의 잘못을 탓하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비판한 이제현(李齊賢)의 언급에서 엿볼 수 있다.
나라사람들이 현왕(현종을 말함)의 아들이 형제간에 서로 전한 것을 보고 듣는데 익숙하였으므로, 선왕(선종을 말함)이 다섯 아우가 있었는데도 어린 아들을 세웠다 하여 그것을 그르다 여기니, 생각하지 못함이 어찌 그리 심한가? 상세정보 
그래서 자신보다 앞선 문종이나 선종, 뒤의 예종, 인종이 경원이씨와 혼인을 했던 것과는 달리 정주유씨와 혼인을 맺었는데, 이는 경원이씨처럼 특정 세력이 외척이 된 후 그를 배경으로 권력을 키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와 함께 태자를 보필하는 조직인 동궁관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첨사부를 비롯하여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었다. 문종이 태자이던 순종을 위해 동궁시위공자 30명을 선발하였던 것에 비하면 진일보한 조치인 셈이다.
숙종대의 사회에 주목할 점은 세 가지이다. 하나는 남경의 건설이다. 이미 문종 때에도 남경을 설치한 바 있지만, 이는 ‘남경’이란 관부를 둔 것에 불과한 정도이다. 반면 숙종은 이보다 훨씬 큰 규모로 남경을 새로이 건설하였다. 1099년(숙종 4)에는 김위제(金謂磾)의 주장에 따라 남경(南京)을 중시하여 친히 터를 잡고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두어 궁궐을 조영하게 하였으며, 5년 만에 공사가 끝났다.
하나는 주전정책의 실시이다. 이것은 형제인 의천(義天)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추진된 것이다. 이 정책에 앞장선 의천의 상소문에 따르면, 주전, 즉 동전의 사용은 교환과 운반에 편리하며, 쌀이나 포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수취과정에서의 부정을 방지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농민을 보호하고 이들에 대한 지배층의 불법을 막아서 국가의 경제력 및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유효하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주전정책은 경제발달의 과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왕권의 강화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추진된 정책임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나 의천은 왕실과 국왕의 후원을 받아 천태종을 열었는데, 이것은 경원이씨와 관련이 깊은 법상종 등 교종이 중심이던 당시 불교의 재편을 의미하였다. 이것도 왕권의 강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 같은 배경에서 1097년(숙종 2)에는 주전관을 두면서 금속화폐의 유통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1102년(숙종 7)에는 해동통보(海東通寶)와 같은 동전 15,000관을 주조하여 신하들에게 나누어주고, 1104년에는 지방에 미곡을 방출하도록 하고 주점과 식점을 열어 이곳에서 교역하게 함으로써 돈 사용의 이익을 알리게 하였다. 또 일종의 고액권인 은병(銀甁)도 새로운 화폐로 사용되었다. 1101년(숙종 6)에 은 1근으로 고려의 지형을 본딴 은병을 만들어 통용시킨 것이다. 이것은 은 자체로 국제무역이나 상류층에서 사용되던 것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공인하여 유통시킨 것으로, 이제 은병은 법정통화의 위치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속칭 활구(闊口)로 불렸다는 점에서 입이 큰 모양이었다. 이 같은 노력은 도시에서는 어느 정도 화폐가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다지 활발하게 유통되지 못하였다.
다른 하나는 대외관계의 변화, 즉 여진의 성장에 따라 고려 북쪽 국경이 불안정해진 점이다. 즉 북만주의 송화강 지류인 아르추카 강 유역에서 완안부가 일어나면서 그 세력이 동남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완안부의 추장인 오아속은 세력이 더욱 커져 고려에 복속하고 있던 여진의 지역인 갈라전 지역으로 군대를 보내 정벌하고, 1104년(숙종 9)에는 고려로 항복해 오는 여진인을 추격하여 정주(定州)의 장성 부근에까지 출현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왕권 강화와 정국의 주도권 장악을 노린 윤관 등이 여진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여 마침내 여진 정벌이 벌어지게 되었다. 임간(林幹)과 윤관이 차례로 정벌을 했지만 모두 고려의 패배로 끝이 났다. 이 전쟁을 이끌었던 윤관은 패배의 원인이 여진은 기병이고 고려군은 보병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군대로 별무반을 창설하게 되었다.
윤관(尹瓘)이 참지정사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 겸(兼) 태자빈객(太子賓客)으로 옮겨 아뢰기를, “신이 적의 기세를 보니 강성함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니 마땅히 군사를 쉬면서 대비하여 후일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또 신의 패한 바는 적은 기병이고 우리는 보병이어서 가히 대적할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건의하여 처음으로 별무반(別武班)을 세우고 문무 산관(散官)과 이서(吏胥)로부터 상고(商賈) 복예(僕隸) 및 주(州)·부(府)·군(郡)·현(縣)에 이르기까지 무릇 말을 가진 자는 다 신기(神騎)를 삼고 말이 없는 자는 신보(神步)·도탕(跳)·경궁(梗弓)·정노(精弩)·발화(發火) 등 군(軍)을 삼아 나이 20세 이상인 남자는 과거 보는 자가 아니면 다 신보(神步)에 속하고, 서반(西班)과 모든 진부(鎭府)의 군인(軍人)은 사시(四時)로 훈련하고, 또 승도(僧徒)를 뽑아 항마군(降魔軍)을 삼고 드디어 군사를 훈련하며 곡식을 저축하여서 다시 치기를 꾀하였다. 상세정보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문, 승병으로 조직된 항마군, 그리고 소수의 특수병을 포함한 새로운 부대였다. 이것은 양반, 농민, 승려, 상인, 노비까지도 동원된 전국가적인 조직이었다. 하지만 별무반은 숙종대에 활약하지는 못하고 이후 예종대에 여진 정벌의 주력이 되었다.
숙종대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 노력하던 시기였다. 그는 윤관 등을 발탁하여 자신이 추진하는 정책을 밀고 나갔는데, 이를 ‘신법(新法)’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태조의 유훈’을 강조하며 기존의 제도를 가볍게 고치는 것을 반대한 이들과 대립도 있었다. 하지만 숙종은 정변을 통해 즉위한 국왕이었던 만큼 당시 조정의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과감한 정책들을 시행하였다.




집필자 : 김보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