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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고려) [文宗]

"고려의 황금기를 연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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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문종(고려)

1019(현종 10)∼1083(문종 37). 고려의 제11대 왕이다. 재위기간은 1046∼1083년이다.
이름은 휘(徽), 초명은 서(緖), 자는 촉유(燭幽)이다. 8대왕인 현종(고려)(顯宗)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원혜태후(元惠太后)이다. 형들인 9대 덕종(고려)(德宗), 10대 정종(고려)(靖宗)의 뒤를 이어 1046년에 왕위를 이어 37년간 다스렸다. 능은 경릉(景陵), 시호는 인효(仁孝)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똑똑하였으며,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고 활을 잘 쏘았다. 포부가 넓고 원대하였으며, 너그럽고 어질어서 남을 포용하였다. 모든 정사를 한번 처결한 것은 기억하여 다시는 잊지 않았다.”고 한다. 상세정보 
1019년 12월 계미일에 현종과 원혜태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022년(현종 13)에는 낙랑군(樂浪君)에 봉해지고, 1037년(정종 3)에는 왕실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직인 내사령(內史令)에 임명되었다.
한편으로 원래 그의 어머니인 원혜태후와 또 다른 현종의 비인 원성왕후(元成王后)는 모두 김은부(金殷傅)의 딸로, 자매 사이이다. 문종의 형들인 덕종과 정종은 원성태후의 아들로, 이들은 이복형제이다. 32세로 세상을 떠난 정종에게는 어린 아들이 셋이 있었으나, 나이 어린 왕의 등장을 반기지 않던 고려의 풍습에 따라 27세로 장성하였던 문종이 정종의 뒤를 이어 1046년 5월에 즉위하였다. 당시 고려 사람들이 어린 임금의 즉위를 꺼려했음은 선종(고려)(宣宗)의 뒤를 헌종(고려)(獻宗)에 대한 이제현(李齊賢)의 사찬에서 엿볼 수 있다.
나라사람들이 현왕(현종을 말함)의 아들이 형제간에 서로 전한 것을 보고 듣는데 익숙하였으므로, 선왕(선종을 말함)이 다섯 아우가 있었는데도 어린 아들을 세웠다 하여 그것을 그르다 여기니, 생각하지 못함이 어찌 그리 심한가? 상세정보 
문종은 모두 5명의 비가 있는데, 1비는 현종(顯宗)의 딸인 인평왕후(仁平王后)이다. 인평왕후는 덕종, 정종과 같이 어머니가 원성태후 김씨이므로, 문종과는 이복남매가 된다. 이 혼인은 고려시대 왕실 근친혼의 전형적 사례이다. 또 이자연(李子淵)의 세 딸을 비로 맞이하였는데,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 인경현비(仁敬賢妃), 인절현비(仁節賢妃)가 그들이다. 자식으로는 인예태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순종(順宗)과 선종(宣宗), 숙종(고려)(肅宗), 천태종을 창시한 의천(義天) 등 13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이 있다. 상세정보 
문종은 37년간 재위하면서 고려의 각종 문물을 정비하고 정치에 힘써 고려의 전성기라고 이를 만한 시기를 이끈 군주였다. 이 점은 “문왕은 근검 절약을 몸소 실천하고, 어질고 재주 있는 이를 모두 등용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학문을 숭상하고 노인을 공경하였으며, 벼슬을 적격자가 아니면 주지 않고, 권력이 친근자에게 옮겨가게 하지 않아서, 비록 척리(戚里)의 친척이라 하더라도 공이 없으면 상주지 않고, 총애하는 측근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죄가 있으면 반드시 처벌하였으며, 환관(宦官)과 급사(給使)는 수십 명에 불과하고, 내시(內侍)는 반드시 공능(功能)이 있는 자를 뽑아서 충당하였는데 역시 20여 명이 넘지 않았다. 그리고 쓸데없는 관직을 없애니 일이 간편하고 비용이 절약되어 나라가 부유하였으며, 국고에는 해묵은 곡식이 쌓였고 집집마다 요족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니, 당시에 태평시대라 일컬었다. 송조(宋朝)에서 해마다 포상(褒賞)하는 명을 내리고, 요(遼)에서는 해마다 왕의 생신을 경하하는 예를 표시하였으며, 동쪽에서는 왜(倭)가 바다를 건너와 보배를 바치고, 북쪽에서는 맥(貊)이 찾아와서 백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임완이 ‘우리나라의 어질고 성스러운 임금이다.’ 하였다.”라고 한 이제현의 사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이 글 후반부에 당시 사람들이 ‘태평성대’라고 말했으며, 숙종대의 인물인 임완(林完)이 ‘우리나라의 어질고 성스러운 임금’이라고 한 말에 그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상세정보 
국내 정치적인 부문에서의 상황을 우선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문종은 즉위한 직후인 1047년에 시중 최충(崔冲)을 시켜, 법률 전문가들을 모아 종래의 율령(律令) 등에서 분명치 않거나 의문 나는 점을 상세히 점검해 정비하도록 하였으니, 형법(刑法) 관계의 부분이 크게 정비되었다. 그리고 문종 14년에는 내사성(內史省)을 중서성(中書省)으로 고치는 등의 정치 조직에 대한 개편 조치가 있었고 1076년(문종 30)에는 문무관의 관료제도를 비롯한 정부 조직 등에 대한 정비가 일단락되어, 소위 3성6부라는 고려의 정부 조직이 완비되었다. 이때의 제도가 바탕이 되어 전시과(田柴科), 녹봉제 등 경제적인 제도가 더불어 정비될 수 있었다. 또 지방제도와 관련해서는 1051년(문종 5)에는 지방의 향리들을 9단계로 나누어 승진 규정을 마련하였다. 1063년(문종 17)에는 경기를 기존의 5개 현에서 17개 현으로 범위를 넓혀 확장하였다. 여기에 더해 남경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경제적인 부문의 제도 정비를 살피면, 우선 1049년(문종 3)에는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을 제정하였다. 이것은 5품 이상의 고급관료들에게 상속이 가능한 일정한 토지를 지급해, 양반의 신분 유지에 필요한 재정적 후원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이어 1050년(문종 4)에는 재면법(災免法)을 마련하고,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보충하였다. 이들 법은 각종 재해에 따른 손실이나 작황의 풍흉에 따른 피해를 살펴서 그 정도에 따라 조세를 경감하거나 조절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1069년(문종 23)에는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을 규정해 결(結)의 면적을 확정하였다. 이에 의하면 양전(量田)의 단위는 보(步)로써 정하되 6촌(寸)을 1분(分), 10분을 1척(尺), 6척을 1보로 하고, 방(方) 33보를 1결, 방 47보를 2결로 하여 이하 10결에 이르기까지 그 면적을 명시하였다. 다만 이를 현재의 단위로 환산하기 위한 정확한 수치를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특히 1076년(문종 30)에는 문무관료제의 정비에 짝해 양반전시과가 다시 정해져 고려 전기의 토지법이 최종적으로 완비되었다. 또한 녹봉제도가 문무 백관 및 유역인(有役人)들에게도 실시되었다.
사회적인 부문에서는 앞서 언급처럼 형벌을 정비하기 위한 법률 정비를 이미 즉위 초반부터 하였지만, 이에 더해 1062년(문종 16)삼원신수법(三員訊囚法)을 마련하였다. 이는 죄수를 신문(訊問)할 때 반드시 형관(刑官) 3명 이상을 입회하게 하여 범죄의 조사가 공정히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었다. 1063년(문종 17)에는 국자감에 고교법(考校法)을 제정해 학생의 재학연한을 제한하였다. 이에 따라 유생(儒生)의 재학기간은 9년, 율생(律生)은 6년으로 제한해서 자질이 부족해 재학 기간 중 학업의 성적을 올리지 못하는 자는 퇴학시켰다. 한편으로 이 시기에는 유학이 발전하면서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로 대표되는 사학(私學)12도(徒)가 성립되기도 하였다.
무릇 사학(私學)으로는 문종 때 태사중서령(太師中書令) 최충(崔沖, 984~1068)이 후진들을 불러 모아 부지런히 가르치자 선비와 평민의 자제들이 모여들어 문 앞을 메우게 되었다. 마침내 9재(九齋)로 나누어 그 명칭을 낙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도(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이라 했는데, 이를 일컬어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라고 불렀다. 과거에 응시하는 양반 자제들은 반드시 먼저 공도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매년 여름철에는 절간을 빌려서 여름 수업을 했는데, 생도 가운데 급제하여 학문과 재능이 뛰어나지만 아직 벼슬하지 못한 사람을 택해 교도(敎導)로 삼았다. 학습 내용은 9경과 3사였다. 간혹 선배가 찾아오면 촛불에 금을 그어 시 짓는 내기를 해, 순위를 게시하고 이름을 불러 들어오게 해 술자리를 베풀었다. 미성년과 관례를 마친 성년이 좌우로 줄을 지어서 술상을 받들어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이 예의가 있으며, 연장자와 연소자 간에 질서가 있었다. 날이 저물도록 시를 주고받다가 다함께 시를 읊조리며 자리를 마치니, 보는 사람이 모두 칭송하고 감탄하였다. 그 후부터는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들이면 모두 9재(九齋)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으니, 이들을 최문헌공도라고 불렀다.
또 유신으로서 공도(公徒)를 세운 자가 11명 있었는데, 홍문공도(弘文公徒)는 시중 정배걸(鄭倍傑)이 세운 것으로 웅천도(熊川徒)라고도 하며, 광헌공도(匡憲公徒)는 참정(參政) 노단(盧旦), 남산도(南山徒)는 좨주(祭酒) 김상빈(金尙賓), 서원도(西園徒)는 복야(僕射) 김무체(金無滯), 문충공도(文忠公徒)는 시중 은정(殷鼎), 양신공도(良愼公徒)는 평장(平章) 김의진(金義珍) 혹은 낭중(郞中) 박명보(朴明保), 정경공도(貞敬公徒)는 평장(平章) 황영(黃瑩), 충평공도(忠平公徒)는 유감(柳監), 정헌공도(貞憲公徒)는 시중(侍中) 문정(文正), 서시랑도(徐侍郞徒)는 서석(徐碩)이 세운 것이다. 구산도(龜山徒)는 누가 세웠는지 모른다. 이들을 문헌공도를 함께 세상에서 12도라 불렀는데, 그 중 문헌공도가 가장 흥성하였다. 상세정보 
다음으로 문종대의 국제관계는 기본적으로 성종, 현종대에 세 차례의 전쟁을 거치면서 확립된 거란(요)와의 관계가 대체로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고려의 북쪽 국경 너머에 거주하는 여진과는 1050년을 비롯해 1052, 1064, 1068, 1073년 등에 소규모의 침략이 있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평온한 편이었다. 여진은 자신들의 토산물을 갖고 고려로 내부(內附)할 정도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 주목할 만한 외교적 사건이 발생하는데, 문종이 송과의 교류를 시도하고 결국에는 사신의 왕래를 재개한 것이다. 원래 993년(성종 12)에 거란의 고려 침입을 겪으면서 고려는 송과의 공식적인 교류가 끊어지게 되었다. 거란의 고려 침입이 고려의 친송정책을 저지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고려는 994년에 송나라에 사람을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송이 거절하면서 양국 관계는 더욱 소원해지게 되었다. 물론 송과의 국교가 끊긴 이후에도 사신을 통한 공식 왕래를 그만 둔 것일 뿐, 상인을 통해 교역은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1058년(문종 12) 8월에 문종은 새로 배를 건조하여 송과의 통교를 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는 다음 자료에서 보듯이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당시 고려가 비공식적으로 송과 많은 교류를 하고 있었음과 송과의 통교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치 관계에 영향을 줄 만한 일이었음을 말해준다.
왕이 탐라와 영암(靈巖)에서 목재를 벌채하여 큰 배를 만들어 송 나라와 통하려 하니, 내사문하성이 말하기를, “국가가 북조(北朝 : 거란)와 수호한 뒤로는 국경에 급한 변이 없고 백성이 생활을 편안히 즐기니, 이것으로써 나라를 보전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에 거란이 우리를 힐책한 글에, ‘동으로 여진과 결탁하고 서쪽으로 송 나라와 왕래하니, 이것은 어떤 음모를 하려는 것인가.’ 하였고, 또 상서(尙書) 유참(柳參이 사신으로 갔을 때에 동경유수가 남조(南朝 : 중국 송)와 사신 왕래한 일을 물으면서 의심하고 시기하는 듯하였으니, 만약 이번에 송 나라와 통하려고 하는 이 일이 누설되면 반드시 틈이 생길 것입니다. 또 탐라는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오직 해산물을 배에 싣고 팔아서 생계를 꾸리는데 작년 가을에도 재목을 벌채하여 바다를 건너오고 새로 절을 창건하느라고 노고가 이미 많았으니, 이제 또 거듭 괴롭게 하면 다른 변이라도 생길까 두렵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상세정보 
하지만 11세기 후반이 되면서 거란의 세력이 기울어지면서 고려는 다시 송과의 관계를 재개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에 고려를 통해 거란을 견제하고자 한 정책이 시행되면서 양국 관계는 재개되기에 이른다.
1068년 7월에 송이 황제의 뜻을 상인 황신을 통해 전달해 왔다.
가을 7월에 송 나라 사람 황신(黃愼)이 왔다. 송 나라 황제가 강회 양절 형호남북로 도대제치발운사(江淮兩浙荊湖南北路都大制置發運使) 나증(羅拯)을 불러서 이르기를, “고려는 옛날부터 군자의 나라라고 일컬어졌으며, 조종 때부터 매우 정성스럽게 우리를 섬겼는데, 그 뒤에 막힌 지가 오래되었다. 이제 듣건대, 그 나라의 군주가 어진 왕이라고 하니, 사람을 보내어 효유(曉諭)하여야 하겠다.” 하니, 이에 나증이 아뢰어서 황신 등을 보내와 천자의 뜻을 전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객사에서 아주 후하게 대접하였다. 상세정보 
이후 1071년 3월에는 마침내 고려가 김제(金悌)를 사신으로 임명하여 송으로 보내고 뒤이어 1072년에 송이 고려가 요청했던 의관(醫官) 왕유와 서선을 보내오면서 양국은 공식적인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
3월에 민관시랑(民官侍郞) 김제(金悌)에게 표문을 가지고 송 나라에 가게 하였다. 예전에 황신(黃愼)이 돌아가는 편에 복건(福建)에 이첩하여 예를 갖추어 조공하기를 청하고, 이때에 와서 제(悌)를 보내 등주(登州)를 경유하여 입공(入貢)하였다. 상세정보 
이상과 같은 대내외적인 안정과 문물의 정비 속에 당시 사회는 발전을 했고, 앞서 제시한 이제현의 사찬 속 언급처럼 당시를 ‘태평성대’라고 부르고 문종을 ‘어질고 성스런 임금’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 같은 사회적 안정과 문물의 번성 위에 문종은 2,800칸이나 되는 흥왕사(興王寺)를 자신의 원찰로 건설할 수 있었다.
결국 37년이라는 문종의 재위 시기는 사실상 고려의 전성기라고 하겠다. 불교·유교를 비롯해서 미술·공예에 이르기까지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발전을 이루었다. 이것은 신라 문화를 계승하는 동시에 송나라 문화를 수용, 창조적인 고려 문화를 형성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집필자 : 김보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