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콘텐츠 Korean History Contents

시기 1925년 ~ 1928년
이칭 이칭:조공
관련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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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김재봉 강달영 김철
관련사건
관련사건
6·10 만세운동 3·1운동
관련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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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우회 원산노동연합회 고려공산당

조선 공산당 [朝鮮共産黨]

"조선 공산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정당"

이미지
1개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은 1925년 4월 17일 창건된 공산주의 정당이다. 1928년 일본의 탄압과 내부분열로 해산되었다가 1945년 8월 15일과 8월 20일 각각 장안파와 재건파가 출범하였다. 8월 24일 최종통합되어 조선공산당이라는 당명으로 재건되었다가 1946년 11월 23일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합당하여 남조선로동당의 전신이 되었다.


2조선 공산당의 연혁

1918년 4월 이동휘(李東輝) 등이 중심이 되어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생한 이후 한인사회당의 이동휘가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로 부임하여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상해파)을 창립하였다. 또한 1920년 1월 러시아공산당 이르쿠츠크현 위원회 산하에 한인공산당이 창립되었고, 이들도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을 창립하였다.
1922년 10월 코민테른은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두 고려공산당의 통합대회를 개최하도록 하였으나, 대회가 무산되자 코민테른은 원동부(遠東部) 산하에 꼬르뷰로(Корбюро, 高麗部)를 설치하고 두 고려공산당을 해체하였다. 1923년 5월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을 창건할 목적으로 꼬르뷰로 국내부가 서울에서 결성되어 이들과 화요파 사회주의세력 등이 주로 연결되면서 조선공산당이 창건되었다.
조선의 사회주의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진보적인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유학기간동안 사회주의를 접하면서 점차 수면으로 나오기 시작하였으며, 사회주의10월혁명에 영향을 받은, 몰락한 양반과 인텔리겐치아, 민족주의계열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공산당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엠엘파, 화요파, 서울파 등 파벌들의 난립으로 코민테른에서 서로 자기들이 조선공산당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심각한 진통을 겪었다.
1925년 4월 17일 서울 시내 식당 아서원에서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등에 의해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창립하고 초대 책임비서로 김재봉(金在鳳)을 선출했다. 이어 4월 18일 박헌영의 집에서 당의 외곽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는 데 성공하고, 상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였던 박헌영을 고려공청회 책임비서로 선임하였다. 이 당은 화요회 출신이 주동이 되어 이 당을 조직하였다고 하여 일명 '화요회당' 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1925년 11월, 김재봉이 일본 경찰에 의해 구속되면서 해체와 재건을 거듭한다.
 1) 1차 공산당 사건
김재봉과 박헌영은 공산당조직확대와 고려공산청년회원 모스크바파견훈련을 비밀리에 적극 추진하다가 1925년 11월 22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조선총독부 밀정에 의해 그 계획이 탄로되었고, 김재봉, 강달영 등이 체포되었다. 이후 신의주는 물론이고 간도에 있던 조선공산당의 근거지까지 수색, 곧 일제 경찰에 일망타진되었다. 이것이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이다.
 2) 2차 공산당 사건
1925년 12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극비리에 2차로 재조직되었다. 재조직된 공산당원들은 1차 공산당에 가담했던 인물들로, 당 책임비서에는 강달영(姜達永),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권오설(權五卨)이 각각 선출되었다. 이들은 모두 화요회의 요인이며 제1차 조선공산당의 당원이기 때문에 이들에 의한 제2차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재건은 사실상 제1차 당 및 공산청년회의 후속조직이었다. 그러나 '강달영당'으로 부른다. '강달영당'의 정치목표는 좌우연합의 국민적 당을 조직하여 공산당이 실권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강달영당'은 민족주의진영과 천도교 중진 등과도 접촉을 시도, 민족적 기반의 좌우연합당을 성취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추진하였다. 1926년 6·10 만세운동의 참여를 통하여 3·1 운동을 재현하려던 강달영당의 계획은 거사 직전에 밀정에 의해 탄로되어 일망타진당하면서 좌우연합당은 실현되지 못하고, 간부들은 구속되고 강달영당은 강제해산당했다. 이를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이라고 한다.
 3) 3차 공산당 사건(ML당 사건)
12월 정우회선언에 따라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다. 이를 ML(M당이라고 한다. 이 당은 조선공산당사상 이른바 ‘파쟁청산의 통일적 당’이라고 한다. 코민테른은 ML당에 대하여 당조직 운영방침, 단일의 민족혁명전선 조직방침 및 운영방침 등에 대한 11개 조의 지령을 비밀리에 내려보냈으며 특히 단일 민족혁명전선의 운영방침을 명시한 것은 주목할만하다.
그러나 ML당은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당책임비서를 김철수·안광천·김준연(金俊淵)·김세연(金世淵) 등으로 수시로 바꾸었지만, 그들은 1928년 2월 일경에 의해 검거되고 말았다. 이 당의 고려공산청년회도 당과 같은 이유로 책임비서로는 양명(梁明)·하필원· 김철(金哲) 등으로 자주 바꾸다가 당과 함께 검거당하였다.
 4) 4차 공산당 사건
1927년 5월 근우회가 발족되었고, 1928년 2월에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ML당 사건)으로 김준연 등 34명이 구속되었다. 7월에는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170여명이 구속되었고, 9월에는 간도공산당사건이 일어나 조선총독부의 탄압에 의해 강제해산되었다.
 5) 5차 공산당 사건
1929년 2월에는 원산노동연합회가 총독부의 노동운동 탄압에 맞서 총파업 투쟁을 벌였다. 그해 6월 제5차 공산당사건으로 인정식 등 50여 명이 구속되었다. 이때 안광천 등은 북경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였다. 1930년에는 여학생 만세시위 사건으로, 사회주의계와 기독교계가 혼재된 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의 사회주의 계열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3조선 공산당의 활동

조선공산당 창당대회(1차당 대회)는 사상단체(思想團體)인 화요회(화요파)와 북풍회 등이 주도하였고, 김사국(金思國), 이영(李英) 등 서울청년회 계열의 사회주의자(서울파)들은 배제되었다. 1차 당대회에서는 책임비서에 김재봉을 선출하였다. 조선공산당은 조직부, 정치경제부, 간부국, 조사부, 선전부, 노농부 등을 조직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조선공산당의 창건을 알리고 승인을 얻기 위해 모스크바에 조동호와 조봉암을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다. 1차당 대회에서는 조선혁명의 과제가 심의되었고 그것을 민족해방혁명, 반제국주의 혁명으로 규정하였다.
조선공산당은 창립 당시 강령(綱領)을 작성하지는 않았지만, 1926년 6월 7일에 상해에서 발행된 조선공산당의 기관지 『불꽃』에 수록된 「조선공산당선언」에 따르면 조선공산당은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되 국가의 최고 및 일체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조직한 직접, 비밀(무기명 투표), 보통 및 평등의 선거로 성립한다. 또한 직업조합의 조직 및 동맹파업의 자유, 야간노동 금지, 아동노동 금지, 산모의 산전 2주 산후 4주간 노동금지, 대토지 소유자와 회사 및 은행이 점유한 토지를 몰수하여 국가의 토지와 함께 농민에게 교부할 일, 소작료를 3할 이내로 할 일, 농민조합을 법률로 승인할 일 등 40개 항에 이르는 강령을 내걸었다.
조선공산당은 을축년(乙丑年, 1925) 대홍수를 겪으면서 수해 이재민에 대해 모금과 상황 조사를 하는 등 홍수 이재민들을 돕기 위한 전국적인 운동에 참여했다. 또한 전국 각지를 순회하여 농민, 노동자 등에게 강연을 벌이고 일본인 사회주의자를 초대하여 강연회를 여는 등 선전사업을 벌였다. 또한 조선공산당은 서울에 있는 인쇄공 조합, 철공조합, 구두직공조합, 양말직공조합, 물장수조합 등의 각 직업별 노동조합의 창설에 관여하였다. 조선공산당은 출판물로서 『조선지광(朝鮮之光)』과 『신흥청년(新興靑年)』을 발행하였다.
조선공산당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민중봉기를 계획하였다. 당시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인 권오설의 주도하에 조선공산당은 ‘6·10투쟁특별위원회’를 두고 「격고문(檄告文)」, 「복상(服喪) 통곡(慟哭)하는 민중에게 격(檄)함!」등의 전단을 배포하여 일제에 대항하는 투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조선공산당은 1백여 명의 당원이 체포되었다.
조선공산당은 1925년 11월 ‘신의주사건’과 1926년 6·10만세운동사건 등 ‘1·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조직에 치명적 손실을 받았지만 파괴된 조직을 정리하고 ‘서울파 사회주의그룹’인 고려공산동맹을 가입시켜 당세의 확장을 이루어 1926년 12월 6일 조선공산당 2차 당대회를 개최하였다.


4광복이후 활동

조선공산당은 이후 1945년 9월 11일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소군정은 코민테른 즉, 국제공산당의 "1국 1당원칙"에 의거해 조선공산당을 승인하고 김일성에게 '북조선분국'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1945년 12월 17일에 열린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소련 점령군 사령부의 각본에 따라 김일성이 책임 비서로 선출되었다.
조선공산당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에 비판적 입장이었다. 1945년말 임정 요인들의 귀국 직전 조선공산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헌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체제하에서 악전고투하며 구사일생해 온 것은 노농대중이고, 이들이 민족해방의 주체라고 주장하였다. 즉, 국내 혁명세력을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에 두고 인공이 그것을 이어받았다는 이유를 들어 임정 추대에 반대하였다.
1946년 1월 3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민족통일자주독립촉성 서울시민대회를 열었다. 원래 서울시민대회는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대회였는데, 갑자기 찬탁으로 바뀐 채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결의를 하였다. 이는 조선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이 극단적인 폭력투쟁노선과 더불어 인민들에게 외면받는 원인이 되었다.[2]
실질적으로 조선공산당은 김일성의 빨치산파의 압력을 받고 있었으며, 빨치산파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북조선로동당으로 개칭하자 남조선에서도 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합당하여 남조선로동당이 세워졌다.
북조선로동당과 남조선로동당은 1949년 6월 30일 조선로동당으로 이름을 바꿔 합쳐졌으나 실권은 소군정을 등에 업은 빨치산파에 남아 있었다. 박헌영을 지도자로 한 옛 남로당 인사들은 로동당 내에서 남로당파를 형성하였으나, 한국전쟁이후 모두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집필자 : 박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