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콘텐츠 Korean History Contents

조선 노농 총동맹 (朝鮮勞農總同盟)

연관정보 바로가기
시기 1924년 ~ 1927년

조선 노농 총동맹 [朝鮮勞農總同盟]

"일제 강점기 전국적 노동자 농민 대중 단체"

이미지
1개요

1924년 4월 결성된 전국적인 노동자·농민조직. 조선노동연맹회를 비롯하여 전라노동연맹·남선노동연맹 등 전국의 167개 단체 대표 204명이 모여 통일된 노동자·농민조직으로 결성했다. 정운해(鄭雲海)·윤덕병·서정희(徐廷禧)·강달영·신백우·차금봉 등 50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하고, 총무·재무·교육·조사·편집·노동·소작부를 두었다. 참가 단체 자격은 15인 이상의 소작인이나 노동자를 가진 단체면 가능했고, 강령으로는 〈노농계급 해방〉 〈완전한 신사회 실현〉 〈자본가계급과 철저히 투쟁〉 〈노농계급의 복리증진 및 경제적 향상 도모〉를 내세웠다. 노농총동맹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가입 단체 260여 개, 회원수 5만 3천여 명에 달했으며, 노동쟁의·소작쟁의를 적극적으로 해결해나갔다. 그러나 서울청년회와 화요회파 사이에 다시 주도권 쟁탈전이 일어나고,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분리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27년 9월,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리되었다.


2역사적 배경

조선노동공제회와 조선노동연맹회, 그리고 조선노동대회에 의해 주도되었던 한국노동운동은 특히 1923년부터 사회주의운동의 분파가 작용해 분열되고 있었다.
1920년에 결성된 조선노동공제회에서 사회혁명주의자가 분립, 조선노동연맹회를 결성하고 화요파 사회주의자와 결탁해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밀착시켜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조선노동공제회 잔류파와 조선노동대회는 화요파와 대립해 있던 서울파 사회주의운동의 지지기반으로 변신하였다. 그리하여 각기 노동운동을 사회주의운동 기반으로 확장해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일제 아래에서의 한국사회에는 노동운동보다 소작쟁의로 나타난 농민운동이 더욱 큰 민족문제로 부상하고 있었다. 1923년경에는 전국적으로 소작쟁의가 일어나 일제 식민통치와 그 지주적 수탈에 항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노동운동자는 농민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3조선노동연맹회의 활동

조선노동연맹회는 1923년 9월 12일 조선노농총동맹을 발기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었다. 하나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겸한 노동운동을 목적한 점, 또 하나는 조선노동연맹회의 연맹적 조직을 보다 강화하는 점이었다.
이에 대해 조선노동공제회의 잔류파와 조선노동대회측에서는 강택진(姜宅鎭)· 차금봉(車今奉) 등 서울파 사회주의 인사와 더불어 9월 28일 조선노농대회 준비회를 만들어 맞섰다.
그러나 두 개의 준비(발기)는 일제의 집회금지 조치로 모두 실현될 수 없었다. 또한 두 계열이 각기의 지방조직을 확장하는 데만 치중하면서 분열과 대립은 전국으로 파급, 노동자와 농민으로부터 점차 외면당하게 되었다.
전라도·경상도 출신자가 많던 화요파의 지원을 받던 조선노동연맹회는 한때 그 지방의 남선노농동맹이나 전라노농연맹과 제휴하며 보다 우세한 조직의 발전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방의 노농단체들이 중앙의 분파에 저항해 따로 노농단체 결성을 추진하자 이르니 중앙에서도 새로운 조직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중앙의 두 계열 인사는 1924년 4월 16일에 통합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17일에는 조선노동연맹회·조선노농대회 준비회(조선노농공제회 잔류파 및 노동대회)·남선노농동맹의 대표 200명이 모여 조선노농총동맹 발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어 18일에는 167개 단체 204명의 대표가 모여 창립총회를 개최해 이 단체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전국적으로 확대되던 각종 쟁의, 그 쟁의에 개입해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쟁하였다. 또 쟁의를 지원한 것 외에도 기관지의 발간, 형평운동의 지원, 청년운동과의 제휴, 민족개량주의로 지목된 『동아일보』에 대한 규탄 등 노농운동의 주변 문제에까지 관여하면서 일제와 투쟁하였다.
그런데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가중되면서 이 단체는 어떤 집회도 가질 수 없었다. 게다가 지도부의 사회주의 분파로 인해 분열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분열을 극복하려고 해도 회의조차 열지 못하게 하는 일제의 탄압 때문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1925년에는 주도권 문제로 서울청년회 계열과 화요회 및 북풍회 계열 간에 다툼이 노골화되면서 분열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위기는 그 해 조선공산당 창립으로 심각해졌다.
이러한 가운데 1925년 11월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총동맹을 농민동맹과 노동동맹으로 분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뒤 몇 번의 서신투표를 거쳐 1927년 9월 6일에는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리되고 말았다.


4조선노동연맹회의 역할

기구는 총무부·재무부·교육부·조사부·편집부·노동부·소작부로 구성되었다. 50명의 중앙집행위원을 두었는데 그들은 거의 화요파와 서울파 등의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강택진· 김종범(金鍾範)·박병두(朴炳斗)·김병숙(金炳璹)· 장채극(張彩極)·문찬두(文酇斗)· 서정희(徐廷禧)· 윤덕병(尹德炳)·유용목(兪龍穆)· 권오설(權五卨) 등 10명의 상무위원을 두었다.
이상의 조직에서 나타난 특징으로는 무엇보다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이원적조직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지식인들에 의한 조직이라는 점과 화요파 및 서울파의 사회주의자들의 연합이 이루어진 점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징 또는 한계성은 있으나 당시 전국의 소작회 등의 농민운동단체나 노동운동단체가 거의 가입해 260여 개의 회원 단체, 5만 3,000명의 회원수를 헤아릴 만큼 큰 규모로 발전하였다.
이 단체의 이념은 강령에 잘 나타나 있다. 강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오인(吾人)은 노농계급을 해방해 완전한 신사회의 실현을 목적한다. ② 오인은 단결의 위력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얻는 데까지 철저히 자본계급과 투쟁한다. ③ 오인은 노농계급의 현 생활에 비추어 복리증진 및 경제적 향상을 도모한다.
그리고 창립대회에 이어 열린 4월 20일의 임시대회에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관한 각각의 결의사항이 있었다. 먼저 노동운동 사항을 보면, ① 각 지방의 노동단체를 조직, 원조해 노동자 상황을 조사할 것, ② 노동운동의 근본정신에 배치되는 단체를 파괴할 것, ③ 강습소나 팜플렛 등으로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철저히 할 것, ④ 노동시간은 8시간으로, 노동임금은 최저 1원 이하는 받지 말 것 등이었다.
다음에 농민운동에 관한 사항은 ① 소작인 단체는 면(面)을 단위로 하여 군(郡)에 연합회를 둘 것, ② 소작인 생활을 조사할 것, ③ 이류(異流) 소작인 단체는 파괴할 것, ④ 소작인 교양은 노동자의 경우와 같을 것, ⑤ 소작료는 3할 이내로 할 것, ⑥ 지세와 공과금은 지주가 부담할 것, ⑦ 두량(斗量)은 두승(斗升)을 쓸 것, ⑧ 소작료 운반은 1리(里) 이내로 할 것, ⑨ 동척(東拓) 이민을 폐지할 것 등이었다.


5의의 및 평가

강령과 결의사항을 통해 이 조선노농총동맹의 이념이 한결 반식민지적 투쟁단체로 강화되고 있었던 점과 노동자·농민의 이익을 위한 투쟁방략을 선명하게 내세우고 있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처럼 이념과 방략에 있어 일제의 지주적 수탈에 대한 투쟁의지가 반영되었던 것은 노동쟁의와 소작쟁의가 고조되던 당시 시대상의 반영이기도 하였다.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은 계급 기반이 달랐다. 각각의 대중투쟁이 높아졌다. 노농의 통합조직이 아니라 따로 중앙조직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1925년 11월19일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에서는 조직을 노동 농민 양 총동맹으로 분립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일제 당국이 모든 집회를 불허하였기 때문에 곧바로 대회를 열 수가 없었다. 1927년 9월7일에야 서면대회를 열어 조선노농총동맹은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립되었다.
조선노농총동맹은 1980년대 후반 노동자대중 앞에 다가온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노동자해방의 새로운 사회라는 '노동해방' 이념과 지향을 이미 1920년대 노동자 선배들이 내걸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노동운동은 자본계급과 철저하게 투쟁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집필자 : 박철하